세상에서 가장 에로틱한 수밀도형 술잔 이야기(20)

Madame de Pompadour(1758)/ Francois Boucher. Marquise de Pompadour at the Toilet-Table(1758)/Francois Boucher. 모리스 캉탱 드 라 투르<퐁파두르 부인(1755)>

南台祐 교수의 특별기고

세상에서 가장 에로틱한 수밀도형 술잔 이야기(20)

유방을 닮은 튤립과 플루트의 잔

 

퐁파두르 후작 부인의 시대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우아한 로코코 양식이 발달했던 시대가 되었다. 볼테르는 퐁파두르 부인에 관해 다음과 같이 추모했다. “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녀를 추모한다… 천성이 진실한 그녀는 국왕을 사랑했다. 그녀는 올바른 영혼과 정의로운 가슴의 소유자였다. 이 모든 것은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셰의 초상화에서 보듯이 우아한 모습의 풍파두르 부인은 상당한 미인임이 틀림없으며 고고한 품격과 교양미가 넘치는 점으로 보아 유럽에서 가장 귀부인다운 귀부인으로 손꼽혔을 만하다. 또한 그녀 옆에 있는 많은 책과 손에 들린 악보가 그녀의 지성과 예술성을 짐작하게 한다. 당시는 보수적인 정치가나 신학자들에 의해 백과사전의 판매가 금지되었는데, 진보적인 문학가나 사상가들은 이를 판매하여야 한다고 격론을 벌이던 때였다. 퐁파두르 부인의 기지로 마침내 프랑스에서 백과사전의 판매가 허용되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루이 15세가 베르사유 궁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을 때 화약 제조법이 화제가 되었다. 그러자 왕자가 “제조법이야 어찌되었건 간에 우리는 매일 사냥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하여 대화가 끊겼다. 이번에는 후작 부인이 “비단 양말은 어떻게 만들까?” 하자 한 공작이 “그것은 전부 백과사전에 있습니다.” 하고 하여 왕이 책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렇게 백과사전의 가치가 인정되어 판매 금지가 해제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라 투르가 그린 그림에 두꺼운 백과사전이 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1747년 그녀는 베르사유 궁전(Château de Versailles) 안에 ‘다락방 소극장’을 만들었다. 불과 14명의 관객들을 위한 소극장 공연들은 1750년까지 계속됐다. 이 소극장에서 몰리에르(Molière)의 희곡 <타르튀프(Tartuffe)>(1667)를 공연하면서 가정부 도린(Dorine)의 역할을 그녀가 맡는다. 극 속에서 타르튀프가 오르곤(Orgon)의 가정부 도린을 유혹하며 말한다. “내가 보지 못하게 그 아름다운 가슴을 제발 가려주오!” 그 순간 관객들의 시선은 가정부 도린, 아니 도린 역을 맡은 마담 드 퐁파두르의 가슴으로 향한다. 퐁파두르의 아름다움에 새삼 매료된 관객들이 갈채를 보낸다. 프로에 가까운 연기 실력을 갖추고 있던 그녀의 노력들은 루이 XV세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첫 연극을 마치고 난 그녀에게 루이 XV세는 “당신은 과연 프랑스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자요”라고 말했다. 그런 가슴으로 루이 XV세에게 지속적인 사랑을 받기 위해 그녀가 음용한 샴페인 잔을 만들었다.

<타르튀프(Tartuffe)>의 공연 때문에 생긴 말일까? 프랑스 샴페인 잔의 모양이 퐁파두르의 가슴을 본 딴 것이라는 얘기가 전해 내려온다. 최초의 샴페인 잔은 지금의 길쭉한 모양과 달리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 헬레네의 가슴 모양으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 관능적인 형태의 쿠페(coupe) 잔 잔으로, 구경이 넓고 깊이가 낮은 형태다. 쿠페 샴페인 잔은 거품이 빨리 사라지고 온도가 쉽게 높아져 곧 현재의 길쭉한 형태의 플루트 잔의 모양으로 바뀌게 된다.

와인 애호가인 그녀로 인해 유럽의 귀족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해 아직까지 최고의 와인으로 대접받고 있는 와인들이 몇 있다. 퐁파두르 후작 부인은 마치 샴페인 같은 여성이었다. 우아하고 화사하되, 야하지 않으며 절도가 있는. 그녀의 샴페인 사랑은 각별하다. 당시 베르사유 궁정에서는 거의 매일 밤 샴페인 파티가 벌어지곤 했는데, 그녀가 얼마나 샴페인을 좋아했던지 샴페인 잔을 잡으면 바닥에 놓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퐁파두르 샴페인 잔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 잔은 바닥의 받침대가 없어 탁자에 세울 수가 없으며 손으로 들고 있어야 한다. 그녀로 인해 샴페인은 18세기의 우아한 ‘로코코 정신을 가장 잘 대표하는 술’이란 찬사를 받았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누구나 할 수만 있다면 그녀를 정부로 삼지 않고는 못 배겼을 것이다. 적당히 훤칠한 키, 고혹적인 자태, 부드러운 얼굴선에 오목조목 균형 잡힌 이목구비, 눈부신 피부와 미끈한 손과 발, 그리고 크진 않으나 생기와 재기가 넘쳐흐르는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듯한 두 눈, 몸동작 하나하나까지도 완벽하게 조화를 이뤘다.” 루이15세 최측근인 셰베르니 백작(1710~1774)이 퐁파두르 부인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예찬한 대목이다.

그녀의 헤어스타일은 여자들이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인데 18세기 초까지는 바로크 시대에 유행했던 퐁타주형, 즉 머리를 틀어 마치 크리스마스트리 모양으로 높이 올리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후기에는 머리카락을 부풀리지 않고 뒤로 빗어 넘겨 우아하고 깔끔한 퐁파두르 형이 유행하였다. 바로 풍파두르 부인이 유행시킨 것이다. 부셰는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화를 여러 점 그렸는데 그중 1758년에 그린 그림 속 그녀는 매력적이고 강한 개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정부라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퐁파두르 부인은 죽는 날까지 왕의 뜨거운 총애를 받았다. 여러 연극의 대본을 다 암송했고 악기 클라비코드를 수준급으로 연주했으며 아마추어로서는 뛰어난 그림 실력에 보석을 디자인할 줄 아는 능력도 갖췄고 원예에도 조예가 깊었다니 그녀는 참으로 다재다능한 여성이었던 것 같다. 유머도 풍부해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능력 또한 뛰어났다.

화가는 그녀의 그 모든 장점을 다양한 지적, 예술적 소품들로 풍성하면서도 짜임새 있게 표현했다. 그래서 왕의 비서실장처럼 일을 도맡아 했는데, 그런 퐁파두르 부인에게 왕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더욱 의지하였다. 그녀는 베르사이유 궁에 들어와 라이벌 격인 왕비 마리아를 정성껏 모시고 비위를 맞추어 왕비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루이 15세는 국정마저도 그녀에게 맡기고 주색으로 세월을 보냈다. 방탕한 왕과 함께한 여인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사생아만도 서른 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서도 20년 이상 왕의 마음을 사로잡아 실제로 프랑스를 통치한 것은 퐁파두르 부인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녀에게는 자연스럽게 적이 많이 생겨났다. 그 가운데서도 어느 짓궂은 악평 가는 그녀가 죽은 후에 쓸 묘비 문구를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고 한다.

20년은 처녀로,

15년은 창녀로,

7년간은 ‘뚜쟁이’였던 여인.

여기에 잠들다.

이러한 저주 때문인지 퐁파두르 부인은 마흔셋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녀는 정적들과의 암투, 매일 밤 계속되는 연회로 지친 몸에 국정과 왕으로부터 매일 밤 시달리다(?) 보니 고작 서른의 나이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급격이 나빠졌는데 거기에서 아마도 왕이 지니고 있던 ‘비너스의 병’, 즉 ‘성병’이 옮겨진 것도 한몫했다고 해석하는 역사 평론가가 많다. 그러나 직접적인 사인은 폐렴으로 알려져 있다.

악평가가 쓴 묘비문의 소위 ‘뚜쟁이’ 시기에 해당되는 때의 그림을 보자. 이제는 손에 책 대신에 부채를 들고 있으며 옷만 화려하지 몸은 지친 듯하다.

Portrait of Marquise de Pompadour(1759)/ Francois Boucher. 루이 15세

그녀는 루이 XV세에게 헌신적인 여자였다. 루이의 성격은 매우 신경질적이고, 나태한 편이었으며, 자기 본위적이었는데, 퐁파두르는 그 까다로운 루이의 성격을 맞추었을 뿐만 아니라 왕비의 마리아의 비위도 잘 맞추면서 왕을 보필하였다. 더욱이 퐁파두르는 몸이 건강한 편이 아니어서 복잡한 궁전의 법도와 까다로운 왕을 대하는 것이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리 피곤해도 왕의 사냥에 따라나섰고, 아무리 힘들어도 왕의 잠자리를 거절하는 법이 없었고, 왕이 지루해 하지 않도록 항상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할 줄 알았다. 한번은 두통이 너무 심해 퐁파두르가 왕의 저녁 식사에 나가지 못했다. 루이는 그날따라 퐁파두르와 얘기하고 싶었는지, 시종에게 그녀에게 열이 있는지 물었다. 이에 시종이 열은 없다고 하자, 루이는 열이 없으면 별 일 아니니, 빨리 나오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두통으로 누워있던 퐁파두르가 왕의 식사에 나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화장을 해야 했고, 그 복잡한 의상을 차려 입어야 했고, 온갖 액세서리로 몸을 치장해야 했다. 그녀는 이렇게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얼굴에 표시하나 내지 않고, 왕의 식사에 나가 왕을 즐겁게 해 주었다고 한다.

그녀의 이러한 행동이 사랑 때문이었는지, 야망 때문이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어쨌든 그녀는 고도의 자제력과 우아함을 갖춘 멋진 여성이었다. 그녀의 패션 감각과 인문학에 대한 지식, 미술, 음악에 대한 조예는 당대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회자된다. 그리고 퐁파두르는 그녀답게 와인 가운데 샴페인을 즐겼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 지칠 대로 지친 부인은 궁 안에 녹원을 마련하고는 거기에 각처에서 데려온 미녀들을 모아놓고 왕에게 고르게 하여 매일 밤 젊고 매력적인 미녀를 대령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7년간은 뚜쟁이였다는 악평이 나온 것이다.

그녀의 죽음에 왕은 그녀의 곁을 결코 떠나지 않으려 했고, 장례식 때는 정식부인이 아니어서 참석할 수 없자, 외투와 모자도 쓰지 않은 채 발코니에 서서 계속 찬바람을 맞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가히 한 시대를 그 정점에서 풍미한 여성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여인으로 인하여 보르도와인이 프랑스 황실에 공식적인 와인(샤토 라피트 로칠드)으로 선정되었다. 그 전까지는 부르고뉴와인이 황실 전용와인이었다. 루이 15세의 애첩으로서 19년간 베르사유궁을 지배했던 마담 드 퐁파두르, 양귀비나 장희빈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삶은 ‘왕의 여인’이라는 야사의 영역에 머물렀다. 그러나 여성이 사회에 진출할 수 없었던 근대 이전, 능력 있는 남성을 유혹하는 일은 여성에게 가장 ‘정치적’인 일이었다. 미모와 사교술을 동원해 권력자를 장악함으로써 베개 밑에서 세계를 움직인 역사의 숨은 주인공으로 활약했던 것이다.

마담 드 퐁파두르는 역사를 움직인 왕의 정부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이다. 또 예술에 대한 사랑과 관심으로 부셰·샤르댕·피갈·볼테르 등의 저명한 작가를 후원해 로코코양식을 창조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루이 15세는 철권 정치를 하면서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던 루이 14세의 증손자다. 나이 5세에 제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올레망 공인 필립이 섭정을 맡았고 그 뒤에도 폴뢰리 추기경이 실권을 쥐고 있어 그는 군왕으로 변변히 구실을 하지 못했다. 성질은 매우 신경질 적이고 나태한 편이어서 정치는 유능한 대신에게 맡기고 자기는 애첩인 마담 드 퐁파드르와 함께 연회를 열고, 풍미가 넘치는 와인을 즐겨 마셨다 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미루어 볼 때, 계몽시대로 향하던 시대적 배경에서 선왕(루이 14세, 짐이 곧 법이다)의 철권정치에 염증을 일으킨 루이 15세는 나이 다섯 살에 제왕에 올라 일은 소홀히 하고 총명과 재치가 넘치는 드 퐁파두르 마담과 더불어 와인의 향취에 탐닉하면서 명주에 얽힌 숱한 일화를 가꾸어낸 듯하다. 그리고 이러한 환락과 흥취 속에 프랑스 대혁명의 폭풍이 배태되고 있었음은 그들 자신도 알지 못했다. 한편 마담 드 퐁파드르는 매우 예지적이고 지혜가 뛰어나 루이 15세에게 여러 가지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진다.

아마도 선왕의 철권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태생적으로 나약한 성품 탓으로 정치의 거센 물결에 뛰어 들기보다는 총명과 재치가 넘치는 마담 드 퐁파드르와 함께 와인 잔을 드는 것이 한결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로 와인에 엮인 군왕 이야기가 나오면 늘 루이 15세가 자리하고 있는 것인 듯하다. 루이 15세가 주최한 축제 만찬에서 샴페인은 왕족으로부터 그 명성을 얻었다.

루이 15세는 유별나게 모에 샹통의 샴페인을 즐겨 마신 것으로 유명하다. 고혹적인 황금빛 속에 쉴 새 없이 일고 있는 잔잔한 기포를 보면서 샴페인에 매료 된 루이 15세는 저녁 만찬 때마다 이를 애인 폼파두르와 즐겨 마셨다 한다. 이 만찬에 쓰인 샴페인에는 왕실의 스탬프를 찍었다고 한다.

남태우 교수
남태우 교수:중앙대학교(교수)▸중앙대학교 대학원 문헌정보학과 박사▸2011.07~2013.07 한국도서관협회 회장 ▸2009.07 한국도서관협회 부회장▸2007.06~2009.06 대통령소속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 위원 ▸2004.01~2006.12 한국정보관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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