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민의[삶과 맥주]
‘로버스트 포터’ 이야기
“산업혁명기 도시 노동자계층인 짐꾼(porter)들이
즐기던 술이라는 데서 전해진 현대 로버스트 포터”
20여 년 전 미국 서부에서 시작된 새로운 수제맥주 문화는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음주문화 속 맥주의 자리,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의 태도, 관련산업의 지형까지도.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크게 변한 것은 맥주 자체가 아닐까 한다. 맥주라고 하면 그저 깔끔하고 시원한 라거뿐이던 시절에서 천여 종의 다양한 맥주들이 생산되고 계속 개발되는 시절로 변하는 데 그 정도 시간밖에 안 걸렸다는 것은 인간의 무한한 창조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일 것이다. 그러나 그 새로운 맥주들도 따지고 보면 오래 전에 유행했다가 근근이 명맥만을 유지해 온 스타일을 현대에 맞게 변형한 것이라고 하니 일제 강점기에 명맥이 끊어졌다는 몇 천 종의 한 국술이 새삼 아쉽다.
현대 수제맥주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는 것들 중에 로버스트 포터라는 맥주가 있다. 브라운 포터보다는 진하고 스타우트 보다는 연한 바디에 로스팅한 맥아의 영향이 강하면서도 홉에서 오는 쌉쌀한 과일향이 은근히 남아 있으며 뒷맛에는 초콜릿, 커피, 바닐라의 풍미를 품고 있는, 깊고 화려하고 복합적인 맛의 맥주다.
포터라는 맥주의 이름은 산업혁명기 도시 노동자계층 특히 열차나 선박의 하역장에서 일하던 짐꾼(porter)들이 즐기던 술이라는 데서 왔다고 하는데 현대 로버스트 포터의 미묘한 화려함을 생각한다면 언뜻 기원과 현실이 잘 매치되지 않는 것 같다.
사실 산업혁명 초기 영국에서는 오랫동안 충분히 로스팅한 몰트로만 양조해 오던 진한 흑맥주 스타일이 인기 있었다고 한다. 산업혁명의 성공과 함께 물자의 수량은 물론이고 맥주에 돈을 쓸 수 있는 소비자의 수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늘어났는데 거기에 대응해 양조방식도 대량화 효율화를 향하게 된다. 어느 날 한 양조자가 당시 흔하고 저렴했던 페일몰트를 주로 하고 로스팅된 몰트를 어느 정도의 검은 빛을 내 사람들이 쉽게 마실 수 있으면서도 가격은 저렴한 새로운 흑맥주를 양조하였고, 이것이 당시 노동계층의 요구에 맞아 영국에는 포터의 전성기가 열린다.
당시 포터가 얼마나 인기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예가 하나 있는데 1814년 런던 맥주저장고 붕괴사고다. 산업혁명의 성공으로 도시에는 공장들과 물류센터들이 속속 들어서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드나들었다. 케그나 소형탱크에 저장하는 방식으로는 급증하는 맥주수요에 대응할 수 없다고 판단한 양조자들은 도시 곳곳에 거대한 맥주저장고를 짓기 시작한다. 누군가 1만 리터규모의 저장고를 만들자 다른 이는 5만리터규모, 다음은 10만리터규모. 경쟁적으로 맥주저장고 대형화의 붐이 일어난 지 몇 년이 지나자 런던에는 단일 270만 리터규모의 맥주저장고까지 존재했다고 한다. 무한하기로 치면 인간의 창조성에 크게 밀리지 않는 것이 바로 인간의 욕망이니까.
그런데 욕망의 끝이 흔히 그렇듯이 어느 날 그 저장고 중 하나가 붕괴하고 만다. 엄청난 맥주의 무게와 탄산가스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탱크가 끝내 터져버린 것이다. 말 그대로 막대한 검은 맥주의 쓰나미가 주변지역을 휩쓸어 헤아릴 수 없는 재산이 포터맥주 속에 잠기고 온 도시를 맥주거품으로 채웠다는 이 만화 같은 사고로 심지어 8명은 귀중한 목숨을 잃고 1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이 사고는 정부의 맥주산업에 대한 규제의 계기가 되었고 이후 다른 종류의 술들이 유행하면서 포터의 인기는 점차 시들어갔지만 쌉쌀하고 묵직한 흑맥주에 대한 사람들의 애정은 인근 아일랜드에 스타우트라는 형태로 살아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근현대 한국사회의 변화를 지켜 본 사람들에게는 어딘가 익숙한 인간욕망의 생성과 붕괴의 과정일 텐데 그렇다면 욕망을 절제하고 정도를 지키자는 뻔 한 교훈으로 포터의 이야기는 끝나는 것일까? 하면 또 그게 그렇지가 않다. 인생과 마찬가지로 맥주 이야기도 다음을 알 수 없다는 점이 재미있는 것이겠지.
현대 수제맥주 양조가들은 근근이 명맥을 유지해 온 이 저렴한 노동자용 맥주 스타일에 다양한 홉과 첨가물을 아낌없이 투여해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맥주로 탈바꿈 시켰다. 원가를 아끼려고 페일몰트를 넣어 덜 진했던 덕분에 로스팅한 몰트의 풍미가 다른 부재료를 압도하지 않은 채 공존하는 독특한 흑맥주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역설. 로버스트 포터 이야기에는 전통과 욕망과 반성과 혁신이 뒤죽박죽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공부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남들처럼 살아가다가 어느 날 이거 인생이 너무 뻔 하게 흘러가는 것 아닌가 하는 회의가 찾아올 때, 가까운 브루어리를 찾아 이 역설적인 로버스트 포터의 독특함을 한번 즐겨보자. 맥주가 자기의 미래를 알 수 없듯이 당신이라는 인간에게도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절대 아무도 모른다. 미리 체념하거나 단정하지 말고 그냥 꾸준히 각자 갈 길을 가자. 물론 그게 외롭지 않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오늘 밤 그 활짝 열린 가능성을 한 잔 쭉 들이켜고 싶다면 다행히 서울브루어리의 로버스트 포터는 국내 최고의 중 하나로 꼽힌다는 점을 말해주고 싶다.
(‘삶과 맥주’ 연재는 다양한 국내 수제맥주에 대한 소개와 감상을 통해 맥주문화의 변화를 함께 느껴보는 자리로 언제나 퀼리티를 지향하는 ‘서울브루어리’와 ‘삶과 술’의 공동기획입니다.)

장성민 작가는:▴1975년생 약사▴서울브루어리 부대표▴2016년 여행에세이 ‘이렇게 일만 하다가는’ 출간▴2017년 아무튼 시리즈 3권 ‘아무튼 게스트하우스’ 출간▴현재 파주에서 아내와 두 딸과 함께 살며 통일이 되면 누구보다 먼저 북한을 여행할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