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長老 2代

윤원일 칼럼

술 長老 2代

“아버지, 장로가 뭐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셔요?”

“너나 술 좀 작작 마셔라 이놈아. 교회 장로란 녀석이 원.”

 

83세로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는 서울의 한 개척 교회의 장로이셨다. 배움이 많지 않았던 분이 장로가 된 건 그 교회 목사가 변두리 동네에서 교회를 개척할 당시 끝까지 목사를 도와가며 전도와 봉사활동을 많이 하셨기 때문이었다. 인품이 온화해서 교회의 성도들이 몹시 좋아하고 따르는 분이란 말을 나는 자주 들었다. 하지만 어머니께선 장로라는 사람이 집에 와선 성경을 펴놓고 읽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며 잔소리(?)를 많이 하셨다. 이유인 즉 다른 장로들은 대표기도 할 때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 구절을 많이 인용하는데 아버지께선 그저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먹고 잘살게 해주시고 죄짓지 말게 하시고 열심을 다해 전도하게 해달라는 내용의 기도만 한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자주 다음과 같이 푸념하셨다.

“장로가 성경책은 안 읽고 맨 날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술만 먹으니 그렇지. 참 네. 원.”

30여 년 전 북한산/도봉산 아래 방학동으로 이사 오고 부터 아버지는 종일 산에서 살다시피 하셨다. 당시는 국립공원 관리가 심하지 않아 동네 노인들이 산속에서 삼겹살도 구워먹고 닭백숙도 끓여먹고 심지언 숲속에 움막 같은 아지트를 만들어 놓고 고스톱도 치고 그랬다. 나의 아버지는 일요일엔 교회 장로였고 평일엔 산채(山寨)의 핵심 멤버였던 것이다. “술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여!” 아마도 아버지는 산체에서 동네 친구 분들과 술 마실 때 이렇게 건배하셨을 것 만 같다.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지만 부모님이 나가는 교회가 집에서 먼 바람에 우리 부부와 아이들은 동네에서 가까운 다른 교회를 다녔다. 직장을 다녔던 나는 거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귀가했다. 그러면서도 일요일엔 꼬박꼬박 교회를 나갔다. 소위 성수주일을 잘 지킨 것이다. 여기엔 아내의 신실한 신앙생활이 견인차 역할을 했다. 아내는 주일 학교 봉사도 열심히 했고 십일조며 감사 헌금도 나름 충실하게 헌금했다. 모두 내 이름으로 헌금을 하다 보니 나는 때가 되자 안수 집사가 되었고 장로 후보에도 무난히 올랐다. 평일엔 직장 동료나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신나게 노는 걸 알 턱이 없는 성도들은 장로 인정 투표에서 2/3 이상이 찬성해 주었다. 십 여 년이 흘러 직장을 퇴직하고 소설가로 등단하자 나의 자유분방한 생활은 더욱 심화되었다. 나는 60세가 되자 자발적으로 장로 직을 조기 은퇴하였다. 한 번은 내가 장로가 된지 얼마 안 됐을 때 아버지가 술에 만취해 귀가하시면서 현관문 앞에 주저앉아 일어서지도 못하시는 바람에 내가 부축해 일으키며 다음과 같이 투덜댔다.

“아버지, 장로가 뭐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셔요?” 그러자 아버지께서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너나 술 좀 작작 마셔라 이놈아. 교회 장로란 녀석이 원.”

어머님 생전에 우린 매년 천안공원묘에 계신 아버지 산소를 찾아갔다. 산소 앞엔 펼쳐놓은 성경책과 그 위에 아버지께서 평소 즐겨 부르시던 찬송가 구절을 새긴 돌 조각물을 만들어 놓았다. 어느 해인가 어머니가 쭈뼛쭈뼛 백을 열더니 흰 종이에 싸여진 무언가를 깨내셨다. 진로 소주였다. 어머니는 산소를 한 바퀴 돌면서 구석구석에 정성스레 소주를 부으셨다.

“당신이 술을 하도 좋아해서 지긋지긋했었는데 오늘은 내 술 한잔 올리니 맛있게 자시구려.”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술 장로 2대인 나는 공원 묘역 위의 하늘과 떠가는 구름을 올려다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윤 원일(소설가) ▴소설집:<모래남자>, <거꾸로 가는 시간>▴장편소설:<노해길의 선물>, <헤밍웨이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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