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원하(본지 발행인)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가을이다. 지난여름 같아서는 이런 가을이 오리라고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여름이 너무 드세서 가을이 어떻게 찾아 올까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기우였다. 몇 십 년 만에 기록을 깼다던 그 무더위도 계절 앞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니 자연의 섭리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새벽녘 서늘함에 이불깃을 당겨야 할 만큼 가을은 소리 없이 깊어가고 있다.
우리 인생도 그렇다. 평생 늙지 않을 것만 같았던 젊음도 어느 사이엔가 얼굴엔 하나 둘 주름이 늘고, 검은 머리 위로 허연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면 가을 인생이다.
나이 들면 마음속 영혼은 청춘 그대로지만 육신은 어딘가 모르게 어줍다. 걸음걸이가 느려지고, 젊었을 때는 일도 아닌 것들도 몸을 사리게 된다. 중장년층이란 소리를 듣던 황금시기를 어영부영 지내다 보니 어느 사인엔가 초로(初老)가 되어 있다. 이시영 박사가 이야기 했듯이 ‘풋영감’소리를 듣게 되는 날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기를 맞는 이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 중 하나가 건강문제다. 그래서 일까. 술자리에서 조차 ‘건강을 위하여’를 외친다.
최근 작고한 최인호 작가는 입버릇처럼 “작가로 죽고 싶다”고 했단다. 그는 그야말로 죽어가면서 글을 썼다고 한다. 그가 평소 얼마나 글 쓰는 것을 사랑했을까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청년작가’란 애칭으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디 작가뿐인가. 알피니스트는 산을 타다가 죽는 것이 영광이라 하고, 장수는 전쟁터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 장수로서 명예를 지키는 것이라면 애주가들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술에 취해 뱃놀이를 하다가 강물에 뜬 달그림자를 잡으려다 빠져 죽었다는 당나라 시인 이태백처럼 죽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피카소처럼 죽어 가는 그 순간에 좋아 하던 술 한 잔을 털어 넣으며 “Drink to me, Drink to my health”를 고하며 세상을 하직해야 하는 것일까. 작가가 죽어가면서 글을 쓰듯 술을 사랑하고 즐길 줄 아는 애주가들이라면 죽어 가는 순간에 술 한 잔을 넘길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아 술맛이 좋아, 고마워!” 독일 신고전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애주가 브람스가 간암으로 임종할 때 술 한 컵을 들이켜고 한 말이다.
이런 표현이 사리에 맞지 않을지는 몰라도 우리 주변에는 실제로 죽어가면서 평소 즐기던 술을 마시고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은가.
굳이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은 술을 많이 먹자는 것이 아니라 평생 먹어야 할 술의 양이 있다면 젊어서 탈이 날 정도로 다 먹어 치우지 말고, 술을 즐길 나이에 술을 마실 수 있도록 분배해서 마시자는 것이다. 늙어서 아니면 술병이 나서 술이 있어도 이를 마시지 못하고 바라만 보는 관주(觀酒)가 되어서는 서글픈 인생이 아닐까.
오늘날 주폭문제가 사회문제로 등장하면서 큰 골치 거리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다. 이는 자기의 주량을 생각지 않고 과도하게 마신 결과다.
술도 음식이다. 과식을 하게 되면 탈이 나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런데 술을 입에 대면 그 적당이란 게 도대체 지켜지지 않는다고 하소연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법화경에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고, 다음엔 술이 술을 마시고, 마지막엔 술이 사람을 마신다’는 구절이 있다. 이는 술에 대한 경계심에 대한 경구다.
술꾼들은 술을 왜 마시는지에 대해 생각 없이 마신다. 술을 마시면 취하기 마련이지만 평생 마셔도 몸의 흐트러짐이 없이 깨끗하게 마시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는 술을 처음 배울 때 잘 배운 사람들이다.
옛 사람들도 술이 백약지장(百藥之長)이라 하더라도 항상 불처럼 위험한 것으로 계영배(戒盈杯)를 만들어 술을 마셨다고 한다. 이는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을 경계하기 위하여 특별하게 만든 잔인데, 술잔에 술이 어느 정도까지 차면 술잔 옆의 구멍으로 새게 되어있다. 이 시대에 주취폭력을 줄이는 방법으로 이 같은 계영배라도 만들어 보급함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