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동영 이태백 시
당시(唐詩)로 대륙 중국을 헤아려보자<24>
차동영 씨의 저서 중국 李白 詩 해설집 ‘그대여! 보지 못했는가?’는 지난 호로 연재가 끝났습니다. 그러나 책 말미에 실은 재매있는 글들을 3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많은 애독 바랍니다. 23회에 걸쳐 연재된 李白 詩 해설집은 많은 독자들로부터 관심을 갖게 했던 연재 물이었습니다.<편집자 주>
시 창작으로 유명했던 황제들
중국은 한문의 나라인 동시에 시가의 왕국이기도 하다. 시경에서 시작되어 수천 년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수많은 시인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가가 탄생했다. 근현대사에까지 전해지는 유명한 시들 가운데는 위로는 재상과 장수들이 지은 것부터 문인과 백성이 지은 것도 있다. 특히 천자인 황제들이 지은 시도 상당수가 된다.
위대한 황제이자 폭군으로도 알려진 진시황은 시를 지을 줄 몰랐던지 현재 전해지는 것이 없다. 아마도 진시황이 시를 지었다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에 대한 시를 창작하여 흥미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 후 진을 역사의 뒤안길로 몰아넣고 한나라의 황제로 등극한 유방의「대풍가(大風歌)」는 유명하다. 기원전 195년, 유방이 허남왕 왕영포를 제거하고 금의환향하여 연 대연회에서 주흥이 무르익자 읊었다는 이 시는 현재까지 널리 전해지고 있다.
큰 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
위세가 천하에 더하여져 고향에 돌아오네
어찌 용사를 얻어 사방을 지키지 않을 쏜가
大風起 雲飛揚(대풍기 운비장)威加海內 歸故鄕(위여해내 귀고향)安得猛士 守四方(안득맹사 수사방)
세 구절로 된 짧은 시가 역대 황제 시 가운데 첫 장을 장식한 시가 되었다. 유방은 시정잡배에서 천자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런 그가 금의환향했으니 당시 그의 위풍이 얼마나 당당했을지 짐작이 갈 듯도 하다. 금의환향하여 지은「대풍가」는 그때 유방의 심정을 그대로 표현해주고 있다.
이 시의 분위기는 의기충천하며 새로 패업을 달성한 황제가 맹장을 찾고 천하를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동감 있게 드러났다. 이 시는 후대에도 높은 기재의 상징으로 지칭됐다. 주희는 이 시를 극찬했고, 당 태종 이세민, 시선 이백, 농민 봉기의 우두머리 홍수전 등 역사적으로 수많은 영웅과 재인들이 모두「대풍가」를 좋아했고 즐겨 애송했으며 이 시를 통해 자신의 기개와 포부를 나타냈다. 유방은 이 한 편의 시로 중국 기사 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하지만 황제들 가운데는 일생 동안 상당한 수의 시를 지었으나 단 한 편의 시도 문학사에 기록되지 못한 황제가 있다. 청의 건륭황제도 그 중 하나이다. 이 같은 역사적 사례에 비추어보면 유방은 철저히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의 삶을 살다 간 주인공이라 하겠다.
건륭황제는 거의 매일 시를 썼으며 일생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를 창작했다.『소정잡록(嘯亭雜錄)』에도 그의 시가 실렸으며 지은 시는 어느 시인보다 월등히 많았으나 현재 전해지는 작품 중 특색이 있거나 후제들이 절창하는 시는 하나도 없다.
시가 전체 발전사를 보면 역대 황제들이 지은 시는 상당수에 이른다. 그중엔 개국 황제가 지은 시도 있고 망국의 군주가 지은 시도 있다. 개국 황제로는 한고조 유방 외에도 위무제 조조, 위문제 조비, 그리고 당태종 이세민 등의 황제들이 시를 창작했다.
조조는 정치적·군사적으로 권력이 가장 강력한 인물이었을 뿐 아니라 문단에서도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패업을 성공적으로 달성한 군주로서 호방한 기개와 진취적인 정신에서부터 비통하게 전락한 데에 대한 한탄까지 시에 담아내 시가 역사에서 시인으로서 추앙받는 인물로 기록됐다. 조조가 남긴 20여 수의 작품에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반영한 시도 있고 개인적인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낸 시도 있다. 또한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묘사한 작품도 있다. 특히 현실을 반영한 수작으로 평가되고 있는「호리행(蒿里行)」과「해로행(薤露行)」은 오늘날까지 널리 읊어지고 있는 작품이다.
「해로행」은 동탁이 한의 헌재를 도와 낙양에서 장안으로 천도하면서 낙양성과 수많은 민가를 온통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던 역사적인 현장을 담았다.「호리행」은 원소와 원술 등의 군벌세력이 뭉쳐 동탁을 토벌하기 위한 처절한 전쟁에서 죽고 죽이는 잔혹한 전장을 반영하고 있다. 다음은 「호리행」이다.
관동에 의로운 이들 있어
흉한 무리 치고자 군사를 일으켰네
맹진에서 만나 처음 기약할 제
마음은 모두 임금 계신 도성에 있었으되
힘을 모음에 가지런하지 못하고
혹은 앞서고 혹은 머뭇거렸네
세력과 이익, 사람을 다투게 하고
끝내는 서로 죽이며 돌아섰네
회남 땅에서는 임금을 스스로 칭하고
옥새는 북쪽에서 새겨지니
갑옷과 투구에는 이가 생기고
수많은 백성 싸움에 죽네
백골이 들판에 널려있고
천리에 닭 우는 소리 들리지 않으니
살아남은 자 백에 하나나 될까
생각하면 애가 타는 듯하네
이 시는 군벌의 혼전과 권력싸움으로 인해 천하가 황폐해지고 수많은 시체가 들판에 널린 비참한 상황을 묘사했다. 작가의 비통한 심정과 군벌에 대한 강한 질책, 난국을 살아가는 무고한 백성들에 대한 동정심 등이 작품 전체에 흐르고 있다. 이 시는 당시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한 말기의 역사적 기록으로도 평가받는 시다.
조조는 이밖에도 개인적인 정서와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그린 시도 여러 편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귀수수(龜雖壽)」에는 낙관적이고 적극적인 기상이 마음껏 표현되어 있어 후대에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안겨주었다. 조조의 작품 중에는 유명한 구절도 많다.「단가행(短歌行)」의 ‘높은 산은 흙을 모아서 된 것이고 깊은 물은 물줄기를 합친 것이네’, ‘주공은 식사 중에도 반갑게 손님을 맞이하며 천하의 마음을 한곳에 모았다네’와「관창해(觀滄海)」의 ‘동으로 갈석산에 올라 푸른 바다를 바라보니 엄청난 물줄기에 험준한 바다가 둘러섰다네’ 등은 후대인들이 즐겨 읊은 유명한 구절 중에 속한다.
조조가 패업엔 성공했으나 사후에야 무제로 추대되었으며, 진정한 개국 황제는 그의 아들 조비가 됐다. 조비는 33살에 위나라의 제1대 황제로 등극했는데 부전자전으로 문장과 재주가 뛰어나 40여 편의 시를 남겼다. 정서상으로는 아버지 조조를 빼닮았으나 역사시나 시의 격조는 다소 떨어지는 분위기다. 그의 시는 남녀 간의 애정이나 이별의 슬픔을 노래한 것이 대부분이며 부친의 작품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을 줬다. 조비의 시풍을 가장 잘 나타낸 시는 「잡시(雜詩)」와「어청하견만선사신혼여처별(於淸夏見挽船士新婚與妻別)」과 「연가행(燕歌行)」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연가행」을 소개한다.
가을바람 소슬하고 날씨 서늘하니
초목은 낙엽지고 이슬은 서리되네
제비는 작별하여 귀로에 오르고 기러기는 남으로 날아가네
멀리 떠난 임 그리니 사모함에 애간장이 끊어지네
달려오고픈 생각 간절하여 고향 그리울 만한데
임은 어이 그대로 타향에만 계시는지
이 몸 홀로 빈 방 지키며
시름 속에 임 생각 잠시도 잊을 길 없어
나도 몰래 눈물 흘러 옷자락을 적시네
가야금 뜯어 청상 가락 올려보니
짧은 노래 가냘파 끝내 길게 잇지 못하네
휘영청 밝은 달은 내 침상을 비추는데
은하수 저쪽으로 기울었으나 날은 아직 어두워
견우직녀 서로 멀리 마주 보건만
그대는 무슨 죄로 이리 멀리 떨어져 있는가
이 시의 전반에 흐르는 애처로움은 읽는 이의 마음을 애절하게 만들어 예술적 가치를 높게 평가받고 있다.<다음호 계속>
☞차동영의 학력및 경력:▴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중어중문학과▴서강대학교 대학원 중국어과▴삼성 배우기 최고가상품 개발▴DMZ종주상품 및 태권도방한관광상품 개발▴CITM(중국국제여유대전)한국관 최우수관 선정 및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