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근 칼럼
희랍인들이 사랑했던 술의 신 ‘디오니소스’
박 정근 (대진대 교수, 윌더니스 문학 주간, 소설가, 시인)
도대체 왜 희랍인들은 술의 신 디오니소스를 사랑했던 것일까. 그들은 바빌론, 시리아, 프리기아, 이집트 등의 에게해 연안의 주민들처럼 계절의 변화에 따른 자연의 아름다움을 사랑했다. 그 지역은 자연현상으로 화려한 장미와 황금빛 콩들의 영광과 쇠락, 자줏빛 포도의 탐스러운 열매의 영락을 충분히 경험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러한 자연의 변화를 경험하면서 희랍인들은 식물들의 죽음과 재생을 통해 신의 존재를 인식하였다.
희랍인들은 그들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식물들의 재생과 동물의 번식을 관찰하면서 신적 개념에 대해 사유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질문은 도대체 무슨 힘이 식물과 동물의 생명을 좌우하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그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을 이해하기 위해 자연의 힘을 인격화하고 그들의 상상력을 통해서 추상적인 개념을 다양한 신과 여신, 유령과 요정으로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그 일환으로서 술의 신 디오니소스를 탄생시켰다. 술의 신 디오니소스는 포도나무와 포도주가 파생시키는 희열을 인격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희랍인들은 그들에게 도취의 희열을 선물하는 포도주를 만들어주었다고 믿는 디오니소스에 대한 경배를 하고 위대한 신으로 숭배했다. 그 경배의 방법으로서 거친 춤과 전율적인 음악 그리고 과도한 음주의 축제를 신화적이고 예술적으로 창조하게 된 것이다.
축제 참여자들은 디오니소스 축제를 벌이면서 술잔치와 떠들썩한 유흥을 즐겼다. 축제에서 보여주는 그들의 모습은 매우 원시적인 이미지로 재현되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나체나 반나체로 피리와 북을 연주하며 가락과 장단에 맞추어 숲과 들을 배회하였다. 상상해보라. 고대문명의 상징으로 인정받는 희랍인들이 옷을 벗어던지고 도취의 흥에 겨워 흔들흔들 거니는 모습을 말이다.
주신제 참여자들은 술의 도취적 효과를 이용하여 자신의 본능을 감시하는 의식을 잠재운 상태를 지향한다. 그들은 몰아지경에서 무의식 속에 잠복해있는 본능의 발현을 고대하며 주문을 읊조린다. 이러한 모습은 어쩌면 그들을 낳게 한 자연으로 회귀하려는 실존적 몸짓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도취의 절정에서 성적 충동을 재현하는 양 “에비, 에반”이라고 소리치며 몰아지경 속에서 숲과 들을 배회하였다. 술을 사랑하는 현대의 독자들이여, 여러분들이 술에 취해 흥에 겨워 노래하고 춤을 추는 모습과 디오니소스 주신제의 참여자들을 흥미롭게 비교하기 바란다. 아마도 그 유사성에 야릇한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으리라.
디오니소스를 경배하기 위해 열린 주신제는 환희에 들뜨고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 축제를 상상을 통해 그린 그림을 참고하면 이 술잔치에는 메나드들, 박코스 신도들, 반인반수의 사티로스들과 주신인 시레니스가 참가하고 있다. 그들은 포도나무로 만든 장식한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푸생이 그린 그림은 사티로스가 포도즙을 짜서 넣은 술병에서 포도주를 따라주는 아이를 뒤에서 받쳐주고 있는 이미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사티로스 앞에는 벌거벗은 박코스 여신도가 아이를 껴안은 채 농염하게 누워있다. 이 여신도의 자태는 그야말로 술에 취해 몽롱한 도취를 즐기는 것으로 섹시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푸생의 그림에서 나체의 여인과 반인반수의 사티로스를 대비시키는 것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거나 탐하는 남성적 존재를 예술적으로 재현하는 효과가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그들은 취한 채 나른하게 누워있는 여체를 능욕하려는 폭력적 존재가 결코 아니다. 그들은 모두 흥겨운 디오니소스 축제에 참여하여 포도주를 마시며 흥에 겨워하는 디오니소스의 숭배자들일 뿐이다. 다만 아름다운 여신도의 나체를 탐미적으로 두드러지게 표현하기 위해서 인간적 남성보다 더 원시적이고 강력한 사티로스를 등장시켰다. 푸생이 그린 등장인물들은 주신제적 도취의 행복감을 시각적으로 재현하기 위해서 마치 하나의 가족공동체처럼 그리고 있는 것이다.
푸생의 디오니스소스 축제에 대한 회화에는 주신제의 축제의 배경으로서 거대한 나무와 시원한 그늘을 묘사하고 있다. 이 거대한 나무는 그들을 감싸고 있는 대자연이라는 신적 존재를 상징하고 있다. 나무 뒤로 산과 숲이 펼쳐지고 있다. 우리는 디오니소스 신도들이 도회를 떠나서 멀리 산과 숲 속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주신제의 참여자들은 술이 주는 도취와 함께 그들의 본향인 자연 속으로 들어와 본래의 일체감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자신들의 모태라고 볼 수 있는 자연을 망각하고 인위적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거대한 아파트와 시멘트 건물에 갇혀 각종 스트레스로 고통을 받거나 정신적인 문제로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무엇이 우리에게 마음의 병을 발생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감옥 같은 삶이 견딜 수 없을 때 비틀거리며 술집 골목으로 기어들어간다. 우리의 음주 행위는 디오니소스 신도들의 도취를 꿈꾸고 있기에 시작된다. 하지만 구질구질한 도회의 술집들이 어찌 디오니소스 신도들이 술에 취해 거닐었던 산과 숲에 견줄 수 있겠는가. 세상의 술꾼들이여, 술에 취해 상상하라. 디오니소스 신도들이 나체로 배회했던 산과 숲 그리고 들판을 그리며 멋진 한 잔의 술을 마시라. 그대들은 세상의 질곡에서 벗어나 엄청난 자유를 만끽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