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민의 [삶과 맥주] 5
김치처럼 사랑스러운 맥주 사워에일
다른 나라를 오래 여행하다보면 끼니때가 지나 배는 고픈데도 도대체 식욕을 당기는 음식이 없는 순간이 언젠가 찾아온다. 그럴 때면 정성들여 만든 훌륭한 현지음식을 먹으면서도 ‘김치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저절로 떠오르는 것은 한국인으로서는 참으로 막기 힘든 일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도 그런 소울 푸드를 하나씩 갖고 있겠지만 칼칼하고 새콤한 김치에 대한 한국인의 갈망은 그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것 같다.
인간의 후각은 강력한 경고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다. 상한 우유나 부패한 생선의 냄새에서 고개를 돌리게 되는 행동은 그것을 먹었을 경우 인체에 일어날 위기에 대한 예방책으로 진화해 왔을 것이다. 시간과 미생물이 일으키는 이런 변화는 대개 인간에게 불쾌감을 주지만 인간은 이마저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이용해 색다른 음식을 만들어내기도 하는데 그것이 발효다. 인간에게 선택된 미생물이 유당을 비롯한 당류를 먹어치워 유산으로 만드는 과정을 통해 우유는 요구르트가 되고 오이는 피클이 되며 양배추는 사워크라우트, 배추는 김치로 변한다.
그런데 이런 음식들이 가진 시큼한 특성을 적용한 맥주가 있으니 바로 사워에일이다. 그렇다고 학자들이 실험실에서 이 맥주를 개발해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현대 미생물학이 그 작은 녀석들을 발견하고 분리해내기 훨씬 전부터 벨기에의 람빅과 괴즈, 크릭, 독일의 베를리너바이세, 고제 같은 훌륭한 사워에일들은 존재했다. 마치 우리나라에 수많은 종류의 김치가 존재했던 것처럼.
브루마스터들은 양조과정에서 자신의 장비와 도구를 완벽한 무균상태로 통제하고 싶어 한다. 엉뚱한 박테리아나 곰팡이포자 하나가 양조작업 전체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좋은 재료에 정성과 노력을 들이고 오래 기다린 끝에 양조탱크를 열었더니 지독한 냄새가 나는 시큼털털한 액체가 기다리고 있는 상황은 양조자들의 악몽일 것이다.
하지만 적정비율의 미생물 감염과 독창성, 시간, 인내 같은 요소들이 균형 있게 결합한 경우 완전히 색다르고 복합적인 풍미의 맥주가 탄생한다. 사워에일은 자연의 법칙과 인간의 창조성이 결합한 또 하나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락토바실러스, 페디오코커스같은 박테리아나 브레타노마이세스같은 야생효모를 이용해 발효한 이런 맥주의 문제는 처음부터 즐기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처음 먹어 본 외국인이 신김치를 좋아할 정도의 확률이랄까. 여러 가지 종류를 조금씩 맛보고 기름진 음식들과 조합해 보는 과정에서 김치의 맛을 일단 알게 되면 거기에서 헤어 나올 수 없듯이 사워에일이나 와일드에일을 즐기기 위해서도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다. 김치만 해도 수백 종류가 있고 그 숙성방법과 정도에 따라 맛이 변해가는 걸 떠올려 보라. 자연발효가 주는 정형화되지 않은, 살아있음으로 해서 변해가는 음식의 매력. 서양인들이 흔히 펑키하다고 평가하는 시골마당의 흙냄새, 어딘가 퀴퀴한 지푸라기 같은 냄새가 늘 반복되는 일상에 익숙해진, 그러나 마음속으로부터 비일상적인 경험을 갈망하는 현대인의 미묘한 취향을 쏘아 맞히는 것이다.
맥주를 좋아하지만 아직 제대로 된 사워에일을 맛본 적 없는 사람이 언젠가 가질 그 첫 순간이 나는 조금 부럽다. 첫 충격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잔 밑에서 올라오는 스파클링 와인과도 같은 미세한 거품과 펑키하게 싸한 향기 그리고 입안의 잔맛을 싹 씻어내는 상큼한 신맛을 조금씩 즐기기 시작할 때, 당신은 이미 수제맥주 초심자가 아니게 된다. 한국음식을 좋아하지만 김치는 싫어한다는 외국인에게 당신이 느끼는 위화감처럼 사워에일을 아직 모르든 이전에 맛 보았지만 질색했던 경험이 있든 수제맥주계의 큰 장르이자 가장 앞서가는 트렌드인 분야를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은 맥주 팬으로서 안타까운 일이다.
하루가 다르게 쌀쌀해져 가는 가을, 힘든 일과가 끝난 후 펍에 들러 이 재미있는 맥주를 주문해 보자. “사워에일이나 와일드에일 종류 하나 추천해 주세요.”
요즘 크래프트비어펍은 대개 두 세 종류 이상의 사워에일을 갖춰놓고 있으며 와일드에일을 주종으로 한 브루어리들도 생겨나고 있으니 선택에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그 상큼하고도 아린 신맛이 당신의 몸에 쌓인 끈적이는 기름기를 싹 씻어내 주기를. 긴 여행 끝에 한국에 돌아와 처음 먹는 한 접시의 잘 익은 김치처럼.
(‘삶과 맥주’ 연재는 다양한 국내 수제맥주에 대한 소개와 감상을 통해 맥주문화의 변화를 함께 느껴보는 자리로 언제나 퀄리티를 지향하는 ‘서울브루어리’와 ‘삶과 술’의 공동기획입니다.)
작가소개
장성민
▴1975년생 약사▴서울브루어리 부대표▴2016년 여행에세이 ‘이렇게 일만 하다가는’ 출간
▴2017년 아무튼 시리즈 3권 ‘아무튼 게스트하우스’ 출간▴현재 파주에서 아내와 두 딸과 함께 살며 통일이 되면 누구보다 먼저 북한을 여행할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