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녕하 칼럼
“느려서 더 이뽀요”
몇 번을 봤는지 따질 수도 없이 많지만 ‘서부영화’만 나오면 채널이 고정된다. “그거∼ 전에 봤잖아? 본 걸 또 봐요?” 그 다음 장면은 어떻다는 둥 저러다가 어떻게 끝난다는 둥 옆에서 ‘김 빼기 작전’을 펼친다. 드라마를 선호하는 아내의 투정인데, 그래도 막무가내 채널고정이다. 왜 채널고정인지, 봤던 걸 왜 또 보게 되는지, 막상 그 이유를 잘 모르면서도 자꾸 봐왔다. 그래서 한다는 대답이 “명화니까!”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명화가 어디 ‘서부영화’뿐이랴! 대답이 이렇게 궁색하니 아내의 태도가 심드렁해질밖에.
아내가 불만인 이유는 또 있다. 말티종 애완견 두 마리를 키우는데, TV에서 말(馬)이 나오거나 악당이 총을 쏘거나 하면, 영락없이 앞발을 굴러대면서까지 TV화면을 보고 짖어댄다. 그때마다 “시끄러! 조용히 해!” 하고 엄숙한척 야단을 치지만, 신기한 건 강아지들이 악당을 어떻게 알아챘느냐? 였다. 사람도 아닌 개(犬)가. 말(馬)은 알아봤다고 쳐도.
어느 해인가? 개전문가인지, 동물학자인지, 동물의학박사인지 하는 사람이 TV에 나와서 한 말이다. “개는 천연색을 보지 못한다”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그렇다면 북극곰이 설원을 걷거나 유빙(流氷)에 앉아있거나, 제법 빠르게 흐르는 강물 여울목에서 허공중으로 튀어 오른 연어를 불곰이 넙죽 받아 채거나, 하얀 고양이를 껴안고 탤런트가 화면에 나오거나 해도 꼭 짖어댄다. 그래서 그 사람이 한 그 말 틀린 거 아냐? 개가! 천연색도 흑백으로 인지한다면! 설원 위에 있는 백곰은 그저 허옇게 보이거나, 구별을 못하거나 할 것이고, 검푸른 강물에서 튀어 오른 거무죽죽한 연어도 구별을 잘 못해야할 것 아니겠는가. 개가 말이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개도 천연색을 잘 본다’ 였다.
이렇게 애완견 두 마리와 같이 서부영화를 보며, 권선징악(勸善懲惡)을 논(論)하고 즐기고(喜) 슬퍼하고(哀) 노하고(怒) 탄식(歎)하며 살아가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극적이고 탐미적이며 색정적인 영화가 꼭 더 좋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책(冊)도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는 책은 흥미롭고 궁금하다. 그런 반면 스터디셀러 또는 고전은 늘∼ 관심의 범주에서 내려놓지 않는다. 오늘 못 보면 내일 보던지, 그나마 시간이 여의치 안으면, 구입하여 책장에 모셔놓고 틈나는 대로 숙독(熟讀)하곤 한다. 야금야금 뜯어 먹거나 찢어 먹듯이 음미하면서 천천히 읽어나간다. 명화(名畵), 좋은 영화도 그렇지 아니하겠는가. 보고 또 보면 어떻다는 것인가. 서부영화는 추억을 되살려 내주기도 하고 특히나 화면이 ‘롱샷’이다. 한 폭의 그림이다. 광활한 대지와 특이한 산록의 모습과 경치가 이색적이고 아름답고 눈(眼)이 시원하다. 화면이 흔들리지 않아서 어지럽지도 않다. 게다가 악인(惡人)은 꼭 붙잡혀서 처벌받고 혼난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 악인(惡人)도 많고, 사기꾼도 많고, 몹쓸 인간들이 득시글거리지만, 이를 통제하고 징벌을 내릴 의인(義人)과 법(法)과 정의가 살아있다는 것은 아직 이 세상이 살만하다는 것 아니겠는가. 더욱이 사람도 아닌 애완견이 꾸짖어도 주는 이 세상, 개(犬)만도 못한 인간의 탈을 쓴 악인들을 쓸어버리는 통쾌한 서부영화가 있기에 그나마 스트레스 해소도 되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영화의 화면이 느리게 천천히 시원하게 눈에 보여서 더욱 좋지 아니한가. 양서를, 고전문학을 꼭꼭 씹어 먹듯이 한 줄 한 줄, 맛을 보고 냄새도 맡아보며, 천천히 소화시키며 읽어나가는 재미가 얼마나 좋은 줄 아시는가.
이렇게 느린 것도 좋은 면이 있음을 알기에, 악인을 알아채는 애완견이 있기에, 악인을 통제하고 징벌을 내릴 의인이 있기에 ‘느려서 더 이뽀요!’하며 산다. 개만도 못한 세상에서.
권녕하
시인, 문화평론가 <한강문학>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