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원일 칼럼
♫ 술 마시며 사랑했지 ♬
짜장면과 고량주 이야기
배고프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음식이 짜장면인 사람이 의외로 많다. 나의 경우도 그렇다. 좀 비싸고 근사한 걸 사먹고 싶다가도 중국집 간판을 보면 짜장면에게 발목을 잡히고 만다. 아니 짬뽕을 먹을까? 하는 생각이 뒤따라와서 잠간 갈등을 겪긴 하지만. 짜장면과 짬뽕은 영원한 라이벌이 아닐 수 없다. 중국집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부터 난 짜장면! 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이는 아마도 두 라이벌 간의 갈등을 미리 차단하고 마음을 다부지게 먹으려는 의도에서가 아니었는지. 하 하. 오죽하면 <짬짜면>이란 메뉴가 생겼을까 싶다.
70년대의 허름한 중국집을 떠올리면 여러 가지 추억에 잠긴다. 우리 아버지는 입학식, 졸업식 같은 의의 있는 날이면 불고기나 갈비탕을 사주셨고 그 밖의 좋은 날엔 중국집엘 데려가 짜장면을 사주셨다. 그래서일까.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부터 나는 친구들을 만나면 매번 중국집을 가자고 우겼다. <흰 도꾸리>에 담긴 빼갈(고량주>을 조그만 하얀 잔에 따라 단숨에 짝 들이키던 때의 그 맛은 지금도 혀와 코 속에 생생하다. 안주는 짜장면, 우동, 짬뽕, 또 군만두. 돈 좀 생긴 날엔 탕수육 추가. 그리고 단무지. 언젠가 명동 거리의 한 오래된 중국집 쇼 윈도우에 전시된 <흰 도꾸리>를 보자 불량기(?) 농후했던 내 청춘 시절의 추억들이 물밀듯이 떠올랐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잠간 출판사에서 번역쟁이로 일할 때 나는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집이 전주여서 대학시절부터 말죽거리(양재동)에 방을 얻어서 자취했는데 나는 허구한 날 자취방 근처 동네까지 따라가서 술을 마시고 귀가했다. 우린 주로 단골 중국집엘 갔었고 아내는 여자인데도 독한 술인 고량주를 좋아했다. 월급을 탔거나 가욋돈이 생긴 날은 해물잡탕을 시켜놓고 고량주를 마셨다. 그 <해물잡탕과 고량주>는 환상의 조합이 아닌가 싶다. 아내는 아이들을 낳고부터, 또 지금은 손주들을 돌보느라 술을 예전처럼 잘 마시지 못한다, 그래도 모처럼 부부가 생선회, 등심구이 등 외식을 할 때면 술을 곧잘 마시는데 내가 막걸리나 소맥 같은 부드러운 술을 선호하는 것과 달리 순수한(?) 소주만을 고집한다. 그리고 모처럼 중국집엘 가는 날엔 해물잡탕을 시키고 고량주를 마신다. 그리고 마무리로 꼭 짜장면 한 그릇! 간짜장이나 삼선짜장이 아닌 보통 짜장면. 경험적으로 터득한 사실은 짜장면은 음식점이 허름할수록, 값이 저렴할수록 더 맛있다. 예컨대 호텔의 중국 식당서 먹는 짜장면은 별로 감동적이지 못하다. 반면에 시내를 온종일 배회하다 동묘 인근의 싸구려 중국집에서 사먹는 2500원짜리 짜장면은 그야말로 별미다.
내가 사는 동네의 산책로인 북한산 둘레길에서 시작된 우이천은 활처럼 휘며 동네 한가운데를 흘러 수유리를 지나 중랑천과 만난다. 그 중간 지점인 수유역, 쌍문역에서 가까운 한국전력병원(한일병원) 정문 옆에 해물짬뽕집이 몇 년 전 새로 문을 열었다. 굴과 전복 등 각종 해물을 이리저리 조합한 다양한 해물짬뽕 요리가 전문이다 (이곳에서도 손님유인책으로 3000원 가격의 짜장면을 판다). 아내가 손주 돌보러 평일엔 딸네 집에 가 있고부터 나는 할 일 없이 시내를 배회하다가 저녁 늦게 귀가할 때면 텅 빈 집에 그냥 들어가기가 뭐해 가끔 이곳에 들러 해물짬뽕을 시켜놓고 이과두주 한 병을 혼자서 다 마셔버린다. 알딸딸하게 술이 오른 나는 우이천변의 <가로등도 졸고 있는> 밤길을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며 내가 사는 방학동까지 걸어 올라간다. 인적은 드물고 술이 오른 나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킬킬대고 중얼거리며 걷는다. 지나간 세월의 일들이 떠올라 까닭모를 그리움에 사무쳐 훌쩍거리기도 한다. 혼자서 웃고 성내고 빈정거리며 갈지자걸음으로 대략 한 시간을 걸으면 술도 깨고 내가 사는 아파트 동네로 넘어가는 산길이 나타난다. 한 밤중엔 맨 정신으론 좀 으스스한 길이지만 나는 이 지름길을 택해 집으로 간다. 이상하다. 그 중국집에 가서 이과두주를 마시고 우이천변을 걸어가는 날엔 나는 괜히 <술주정뱅이 노릇>을 맘껏 즐기고 싶어진다. 젊은 시절 중국집에서 고량주 마시며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이 떠올라서 그런 것일까.
ps. 직장 다닐 때 나는 거의 매일 같이 술을 마시고 밤늦게 귀가했다. 잔소리하기도 지쳤는지 아내가 다음과 같이 푸념했다.
“하긴, 술 마시다 정 들었으니 이제 와서 할 말은 없다만….”
윤원일 작가
▴한국외국어대 영어과, 고려대 사회학교(석사)
▴작 품
▵소설집:<모래남자>, <거꾸로 가는 시간>
▵장편소설: <헤밍웨이와 나>, <시인 노해길의 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