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술을 그렇게 마셨냐

TV나 영화 같은데서 술 취해 들어온 아들에게 어머니가 하는 말이 “웬 술을 그렇게 마셨냐?”며 안스르워 한다. 다음 장면은 꿀물 같은 것을 타주고 아침에는 속풀이로 북엇국이나 콩나물국을 끓여주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장면이 바뀌어 남편이 술이 떡이 돼 들어오면 “술하고 원수졌냐”며 허구한 날 술독에 빠져 살면 어뜩하냐고 바가지를 긁어대는 것 역시 일반적인 모습이다.

한국의 어머니는 같은 술에 취했는데도 아들과 남편에 대하는 태도가 아들일 때와 남편일 때가 다르다. 그러다 보니 막 술을 시작한 아들의 풋술에 대해 어머니의 관대한 모습은 자칫 아들을 술고래로 만들 수도 있고, 요즘 사회에서 이슈화 되고 있는 주폭(酒暴)자가 될 수도 있다.

어른들 입을 통해 죽~ 이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술은 어른들 앞에서 배워야 한다.”는 말이 요즘처럼 실감날 때가 없다. 술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술을 시작할 때 올바른 음주문화에 접하지 못하고 그냥 뒷골목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마심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런데서 음주문화를 찾기란 힘들다. 누가 더 많이 마시는 내기라든가 술 취해 정신이 혼미한 상태서 나쁜 짓이나 보고 자란 사람이 성년이 돼 술을 올바르게 마실 리 없다.

자식이 올바르게 성장하는데 어머니 역할이 크지만 자식이 술을 시작할 때는 따끔한 가르침이 있어야지 무조건 관대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사회에서 새삼 주폭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것은 그 도가 지나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술 취한 상태에서 저지른 죄에 대해 법원은 관대했고, 이웃 간에도 술이 취해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는 서로 눈감아 주는 온정주의가 오늘날 심각한 주폭문제를 불러왔다고 여겨진다.

「피고인에게 술을 먹여라」의 저자 서태영 변호사는 그의 책에서 “법정에서 변호인은 기를 쓰고 피고인이 음주로 심신미약 상태”라고 주장하고, 재판부는 피고인에게 “범행 전에 술을 먹지 않았느냐고 넌지시 묻게 된다.”고 했다. 이는 초범인 피고인에게 형량을 감해주려는 배려인데도 눈치 없는 피고인은 혹시 술을 먹었다고 하면 재판부가 더 나쁘게 볼까봐 죽어도 술은 아마셨다고 우긴다고 했다. 이는 과거 술을 마시고 저지른 사건에 대해서는 관대한 처벌을 내린 사례를 든 것이다.

탈무드에서도 “악마가 인간을 찾아가기가 너무 바쁠 때는 대신 술을 보낸다.”고 할 만큼 술은 잘 마셔야지 잘못마시면 악마가 원하는 대로 된다.

그런데 우리사회를 둘러보면 올바른 음주문화를 배울만한 곳이 어디 있는가. 중·고등학생만 돼도 그들은 벌써 술을 입에 댄다. 대부분 부모 몰래 선생님에게 들키지 않게 숨어서 마신다. 하기야 선생님이 다가와도 담뱃불을 끄지 않는 학생들이 술쯤이야 하고 벌컥벌컥 들이키지 말라는 법도 없다.

이런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가면 나도 성년이라며 술을 마음껏 퍼 마신다. 이런 청소년들에게 누가 올바른 음주문화를 가르쳐 줄 것인가.

최근 이란 법원이 금주령을 3차례 어긴 죄목으로 기소된 시민 2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는 외신과 지난 1일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멕시코에서 선거일과 그 전날 등 48시간 동안 상업시설 내 술 판매를 금지했다는 외신을 보면서 술문제는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술을 없앨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미국도 1920년 헌법까지 고쳐가며 금주법(禁酒法)을 시행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술은 존재할 것이다. 문제는 술이 아니라 술 먹고 사고치는 사람이 문제다. 술 취해 저지른 작은 범죄를 놔두면 큰 범죄를 키운다는 것이 정석이다. 마치 ‘깨진 유리창’ 이론과 같다.

귀여운 자식이 술 취해 들어오면 관대한 모습을 보일 것이 아니라 따끔한 훈계로 정신 차리게 하는 것이 진정 자식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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