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중 위(金重緯)
수필가, 行博, 4선의원, 초대환경부장관
‘권주 문화는 살리고 위생은 지키자!’ 이 말은 필자가 지어낸 말이다.
3명이 넘는 술자리에 앉기만 하면 필자가 외치는 구호다. 우리나라 음주문화는 어차피 권주문화다. 오죽하면 “한잔 먹세 그려/ 꽃 꺽어 셈하면서 먹세 그려/(죽고 나면)뉘가 술 한 잔 하자 하리오”/하는 송강(松江)의 장진주사(將進酒辭)가 다 쓰여졌을까?
자기가 마시고 난 술잔을 친구에게 권하는 우리네 음주 문화는 어찌 보면 그지없이 아름다운 문화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술 한 잔 권하지 못할 술자리라면 얼마나 삭막하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위생이다. 기름끼가 철철 넘치는 질펀한 고기 안주로 술을 마시고 난 다음의 술잔을 남에게 권하려고 보면 그 술잔은 온통 술과 기름이 뒤엉킨 난장판의 유리잔으로 보일 뿐이다. 도저히 내 양심으로는 건넬 수가 없다.
하여 필자는 아주 오랫동안 다 마시고 난 다음의 술잔을 권할 때에는 그 술잔을 내 와이셔츠 팔뚝에 문지르고 난 다음에야 권하곤 하였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왜 하필이면 와이셔츠에 문지르냐고 묻는다. 필자는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옷 중에서 와이셔츠보다 더 깨끗한 옷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연신 와이셔츠에 술잔을 문질렀다. 그랬더니 한 동안은 내 이런 모습을 보고 많은 친구들이 필자를 따라 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필자는 와이셔츠에 문지르는 것만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예 권주용 술잔을 따로 마련해서 사용하면 어떨까 싶었다. 소주잔과는 다른 형태의 술잔이면 족할 것 같았다. 드디어 찾았다. 백세주 잔이다. 소주잔에 따라 놓은 술을 백세주잔에 따루어 보니까 한방울도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필자는 시범을 한다. “권주 문화는 살리고 위생은 지킵시다”하면서 백세주 잔에 가득 부운 술을 내 빈 소주잔에 따른다. 나는 나에게 배당된 소주잔으로만 술을 마실 뿐 백세주잔은 권주용으로 다른 사람에게 건네어 진다. 건넨 백세주잔에 술이 그득 담겨지면 그 잔을 받은 사람은 그 잔을 자기의 빈 잔에 따르고 다시 다른 사람에게 권한다. 이때 자기 잔은 놔두고 권주용 잔에 잘못 입을 갖다 대는 일이 종종 생긴다. 그럴 때면 벌주 한 잔을 먹이는 것으로 값을 치른다. 그리고 입에 댄 백세주잔은 금방 퇴출시키고 새 잔으로 바꾸도록 한다.
이렇게 해서 빈 백세주잔은 연방 권주용으로 좌석을 돌고 자기에게 할당된 잔은 까딱도 없이 자기혼자만 사용하도록 제자리를 지킨다. 이것이 권주 문화는 살리고 위생은 지키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다가 보니까 백세주잔이 빨리 회전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좌석에는 주량이 센 사람도 있고 약한 사람도 있는데 똑같은 속도, 똑같은 양의 술이 똑같은 백세주잔에 실려 주객들 앞에 놓여 지니 이건 술이 약한 사람에게는 여간 고역이 아니다.
그러나 걱정 할 것 까지는 없다. 어차피 술도 음식이다. 배가 부르면 더 이상 못 마실 수도 있고 취하면 아무리 권해도 마시지 못한다. 더군다나 옛 선인들의 말처럼 “술을 권할만한 친구에게 술을 권하지 않으면 친구를 잃는 것이요. 권하지 말아야할 사람에게 권하면 술만 잃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적절히 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요즈음에는 잘 쓰지 않는 말이지만 ‘주태백’이라는 말이 있다. 중국의 이태백에서 연유되었으리라 짐작이 되는데 고주망태로 술을 마시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실제는 이백(李白)도 우리가 얘기하는 것만큼의 주태백은 아닌 것 같다. 그의 (詩)중에는 “둘이서 술잔 돌리는 사이 소리 없이 꽃은 피고(兩人對酌山花開)/한잔 들고 또 한잔 들고 다시 한잔 마시고 보니(一杯一杯 復一杯)/나는 이제 취한채로 자고 싶은데 (어쩌려나) 자네는 그만 가도 되겠네(我醉欲眠君且去)/내일도 오고 싶으면 거문고나 가지고 오게나(明朝有意抱琴來)”하는 시가 있다.
이 시를 보면 웬만큼 취한 상태면 스스로 알아서 잠을 청했던 것 같고 막역(莫逆)의 사이라 하더라도 이제는 그만 마시고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태백이라면 어찌 그리 절도가 있었겠는가? 취해 그만 돌아가겠다는 사람도 붙들고 한잔 더 하자고 할 정도가 되어야 주태백이가 아니겠는가?
수주 변영로의 글 <명정40년>이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니 굳이 중언부언 할 필요는 없겠다. 그러나 소나무 그늘에서 친구 두 셋과 함께 술을 마시다가 비를 만난 김에 옷을 홀딱 벗고 소를 타고 명륜동 뒷산에서 내려왔다는 얘기는 읽은 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아직도 싫지가 않은 얘기다. 그만큼 풍류를 느낄 수 있어서다. 소 타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어렸을 때부터 꼴 베다가 타본 경험이 있지 않고서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도시에서만 살았다면 아마도 소를 탈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럽기까지 하여 더욱 기억이 새로운 것이 아닌가 싶다.
여하튼 비에 젖은 옷을 벗고 알몸으로 내려왔으니 그 사이 술은 다 깨었을 터이다. 그가 주태백이었다면 모르긴 하되 명륜동으로 내려와 한잔 더 했을 법도 한데 그 얘기는 들어 보지 못했으니 분명히 주태백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오직 풍류객이었지 않았나 한다.
주태백 하면 조선조의 화가 최북(崔北)이 단연 으뜸일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집 앞은 언제나 그에게 술 팔려는 사람으로 저자를 이루었다니 가히 그가 얼마나 술을 좋아 했는지를 짐작할 만하다. 죽을 때에도 술이 취한체로 길거리에서 얼어 죽었다.
죽림칠현 중에 유영(劉怜)이라는 주태백이 있었다. 그는 술 마시러 갈 때에는 언제나 하인에게 삽을 들려 따라오게 했다고 한다. 술에 취해 쓰러지면 아무데나 묻으라는 뜻이었단다. 상상도 못할 저항이요 자학이다.
나 같은 술꾼은 어떨까? 어느 한때 방황하던 젊은 시절! 후배들 둘을 데리고 요리집엘 갔다. 선배이니 당연히 호기를 부릴 일이었다. 째째하게 기어들어가는 대포 집에는 갈 수 없었다. 들어가자마자 큰소리다. “마담있나?” 소리가 자못 옛날 대감이 술집 대문에서 주모를 부르는 듯한 기세로 불렀다. 버선발로 뛰어 나오는 마담. 팔짱을 끼고 방으로 안내하는 대로 보료위에 펑퍼지게 앉는다. 술상이 들어오고 기생이 들어오고 술잔은 몇 십배(盃)가 돌았는지도 모른다. 통행금지시간은 다가오는데 술판은 이제 부터가 시작인 셈이다. 아가씨들 눈치도 별로 헤어질 생각이 없는 폼 세다. 어쩌나 싶다. 밤새껏 요리 집에서 먹자고 할 수도 없다. 나는 결심했다. 자못 비장한 각오로. “우리 다 같이 우리 집으로 가자”
후배들은 박수를 쳤고 아가씨들은 어리둥절했다.
일부러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양 기세등등하게 떠들면서 집대문을 두드렸다. 돈도 못 벌면서 통행금지 시간이 다 되어 들어오는 주제에 웬 큰소리인가 싶어 아내는 종종걸음으로 대문의 빗장을 여는 순간, 이게 웬일인가 하는 눈치였다. 낯선 여자 두 명을 대동하고 자기 신랑이 친구 두 사람과 함께 서 있었으니 놀랄 법도 한 일이었다. 평소에도 손님 데리고 오기로 유명한 남편이니 아내는 금방 눈치를 채고 이부자리를 먼저 깔까 술상을 먼저 차릴까 하고 눈짓으로 묻는 것이었다. 외국은행에 다니는 아내는 내일 아침이면 꼭두새벽에 일어나 밥하고 화장하고 출근해야할 여인이었다.
나는 “술상 차리고 당신도 합석하지!”하는 말을 무심코 했다가 그만 그녀의 도끼눈에 몸은 쪼그라들었다. 그럴수록 나의 호기는 객기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주책을 부린 것이다. 술판이 몇 순배 돈 다음에 우리 남자들은 남자들끼리 한방에서 자고 아내는 술집여인들을 모두 데리고 안방에서 잤다. 이쯤 되면 무슨 술꾼이라 할 수 있을까?
그래도 이제는 철이 든 것일까? ‘권주 문화는 살리고 위생은 지키자’고 외칠 정도가 되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