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나이 스물네 살 때 가방 하나 매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이른바 술 기행(紀行). 참 많이도 다녔다. 제주도내기인 그는 서울, 강원까지 거꾸로 올라가며 유명 술 공장과 재래시장을 깡그리 훑었다.
당시 학생 신분이었던 그는 졸업 후 맥주사업을 해보기로 맘먹었다. 그 즈음 담당 교수의 일성(一聲). “한국의 술도 모르면서 무슨 맥주를 하겠다고….” 그 말에 용기를 내 전국 투어를 결심했다. 어느 기억 하나 버릴 것 없는 값진 경험이 됐음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에피소드 하나. 투어를 떠나기 전, 전북 쪽에 술맛 잘 내는 할아버지가 있다는 얘길 들었다. 익산에 도착해 고속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고서, 다시 시내버스로 갈아타기 위해 기다리는데, 40분이 지나도 감감무소식. 결국 택시를 타고서도 한참을 들어가 찾아간 그곳이지만, 어려운 길 고생했다는 말 대신 욕만 실컷 얻어먹었다. 알고 보니 욕쟁이 할아버지에 성격 역시 불같아 말 한 마디 붙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오던 길 다시 가야하는 일은 쉽지 않았고, 어떻게 해서든 하룻밤 신세를 져야 했다. “저…, 공부하는 학생입니다. 우리 전통주, 우리 누룩, 우리 균을 공부하다가 찾아뵙게 됐습니다. 제게 도움 주시면 안 될까요?” 추레한 모습의 그에게 돌아온 짧고 굵은 몇 마디. “요즘 대기업에서 하도 스파이들을 보내. 비법 캐가려고.” 그 할아버지는 지금 명(命)을 달리하셨다.
인연은 반드시 있다고 믿는다. 그 연(緣)은 사람과도 이어지지만 일과도 맞닿는다. 전봉수(全峯秀․34)씨에게도 그런 연이 있었던 듯싶다. 그는 독일과 체코에서 1년여를 보낸 적이 있다. 유학을 간 건 아니라고 했다. 그저 술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선택한 길이었다고 했다. 그곳의 술 공장, 학교, 사람들을 통해서 많은 걸 배웠다. 한 번은 체코 프라하의 한 브루어마스터와 얘기를 하는데, “당신, 일본인인가?” 하는 질문을 받았다. “난 한국인”이라고 말했더니 “일본 사람들은 그래도 질문 몇 가지 정도는 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대개 사진만 찍어간다”고 말해 얼굴이 화끈했다.
“맥주에 관심이 있느냐고 물어요. 그래서 술에 대해 관심이 많고, 여기 와서 많은 걸 배웠다고 말해줬죠. 그랬더니 수십 년 동안 일하면서 당신처럼 집요하게 물어본 사람은 지금껏 아무도 없었다고 하네요. 그 사람, 저희 가게 오픈했을 때 초청했죠.”
전씨는 독일․체코 여정에서 귀한 인연을 만났다. 당시 독일에서 유학중이던 그의 이모에게서 한 남자를 소개받았다. “혹시 브루어마스터라는 직업을 아느냐”며 이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한 번 만나보라며 자리를 마려해준 것이다. 그 사람이 보리스 데 메조네스(Boris de Mesones)다. 현재 제주도개발공사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결과적으로 전씨에겐 스승이 됐고, 만남을 주선했던 이모에겐 남편이 됐다.
제주시 연동 그랜드호텔사거리 부근의 하우스맥주 전문점 모던타임 제주브루어리는 ‘제주 맥주’로 유명해진 곳이다. 전봉수씨는 지난 2006년 이 가게를 오픈했다. 처음엔 밀레니엄 시대의 개막에 맞춰 2000년에 선보일 생각이었지만, 당시 관련 법(자가양조법)이 허용되지 않아 꽤 미뤄졌다.
“(자가양조시스템) 기계만 있으면 다 되는 줄 알았어요. 숙성·발효 탱크를 광주의 관련 미리 만들어놓은 탱크를 들였거든요. 근데 잘 못 만들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용접 같은 건 잘 돼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된다 하고, 가격도 저렴한 편이어서 일단 갖고 왔죠. 와서 설치해보니 이상한 거예요. 결국 이모부(보리스)와 둘이서 다 뜯어내 새로 만들었어요. 한 달가량 걸렸던 것 같아요. 몇 번의 테스트를 거쳐 술을 내기 시작했는데, 독일에도 없는 방식이 돼 버린 거예요. 온도 유지도 잘 되고…, 생각보다 잘 만들어진 거죠.”
전씨는 올 여름시즌에 맞춰 중문단지에서 하우스맥주 시음회를 실시할 계획이다.
하우스맥주란 업장에서 직접 맥주를 만들어 파는 것을 말한다. 한곳에서 제조와 판매를 동시에 하우스맥주의 특징에 대해 보리스는 “제조와 판매를 동시에 하기 때문에 화학처리를 할 필요가 없다”며 “효모, 단백질, 미네랄 등이 그대로 녹아 있어 영양은 물론 신선함이 살아있다”고 말했다.
시중 맥주는 유통을 위해 탄산을 주입하고 효모의 활동을 억제해야 하는 반면 하우스맥주는 맥주보리 본래의 진하고 부드러운 맛이 살아 있었다.
이곳에서 만든 ‘제주비어’의 특징은 깨끗한 제주의 물과 제주산 맥아만을 사용했기 때문에 구수한 보리내음이 더 짙다는 게 손님들의 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