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에는 ‘술쌀’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우리나라에선 아직도 술쌀이라는 개념이 정립돼 있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밥을 짓기 위한 쌀이 아니고, 술을 만들거나 발효를 통해 쌀을 가공하여 고부가가치의 상품을 만들기 위한 쌀을 말하는 것입니다.
많은 요리 전문가들에게 “좋은 요리를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조리를 위한 기술”이라고 말하는 전문가는 열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열에 아홉 명 이상은 ‘재료’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최근에는 그 재료 중에서도 그 지역에서 생산된 신선한 재료를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일반적인 의견입니다.
‘재료’는 알리지 않고 ‘기술’만 강조하는 국내 술 광고
그렇지만 많은 국내 술 광고를 보면, 하나같이 자기 제품만이 다른 회사와 차별되는, 굉장히 우수한 기술로 만든 것임을 강조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재료의 차별성을 부각시킬 수 없는 소주, 막걸리, 맥주 등 저렴한 대중주의 소비가 대부분인 우리나라의 술 소비 패턴에서는 공장출고가 기준 병당 1000원 이하의 술로 거의 같은 재료를 사용하다 보니 재료의 차별성을 강조할 순 없는 것이겠지요. 재료를 강조하다 보면 심지어 막걸리를 만드는 데 고두밥을 찌지 않고 수입쌀로 만든 팽화미(膨化米·튀긴 쌀)를 쓰는 대규모 업체의 ‘불편한 진실’까지 드러나게 될 것이어서 오히려 재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어차피 싸구려 재료로 만들고 있으니까 기 쓰고 제조에 노하우가 있다고 우기는 모양새지요.
독자들 중에 나이가 50 넘은 분들은 우리나라 맥주가 생긴 이래로 동양맥주(OB)가 항상 1등이었고 조선맥주(CROWN)는 만년 2등(두 회사밖에 없었으므로 사실상 꼴등)이었다는 사실을 잘 아실 겁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1960~1970년대에는 가게에서 냉장된 맥주를 살 때도 ‘OB맥주’가 없다고 해야 ‘CROWN’이 팔렸고(주로 맛보다는 자존심 때문에), 이런 상황이다 보니 순위에는 변동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양대 구도에 변화를 일으킨 사건이 있었으니, 1976년에 ‘정통 독일맥주’를 표방하며 ‘물 좋은 마산’에 공장을 차리고 ‘이젠, 이젠벡입니다’라는 광고카피로 반짝하고 나타난 ‘이젠벡(Isenbeck)’이라는 맥주의 등장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정통 독일방식(저온발효 방식)으로 만든 맛있는 맥주였음에도 결국 OB와 크라운의 아성을 깨지 못하고 미풍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술’ 마케팅에서의 ‘물’의 중요성
이런 맥주시장에 돌풍을 일으키며 순위를 역전시킨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크라운맥주라는 이름을 ‘HITE맥주’로 바꾸면서 ‘지하 150m 암반수’라는 광고카피를 들고 나온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용출되는 암반수를 TV광고에 도입한 것이 압권이었습니다. 결국 50년 만에 맥주시장 1, 2위가 역전됐고, 1998년 조선맥주는 회사명을 ‘하이트맥주주식회사’로 바꾸고 이후 진로소주도 인수해 국내 대중주의 최강자로 부상하게 됩니다. 술에 있어서 막강한 ‘물’의 힘을 느끼셨습니까?
이후 소주, 맥주, 막걸리 광고는 물싸움으로 번지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모 막걸리가 ‘산골 맑은 물’이라는 광고카피를 들고 나왔는데, 그 지역이 구제역으로 인한 매몰 침출수가 가장 많이 나온 지역이라는 말은 하지 않더군요. 소주는 한 회사가 ‘알칼리 환원수’를 주장하자 다른 회사가 이에 딴지를 거는 형국으로 나가고 있지요.
이제 겨우 조상님들이 말한 ‘물 좋은 곳에는 양조장을 차린다’는 말을 일반 소비자들이 이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의 대중주들은 맥주의 경우 알코올이 4.5%~5%, 막걸리는 6%, 소주는 20% 이하의 저도주가 대부분이고, 막걸리와 소주는 일단 술이 만들어진 후에 물을 배 이상 첨가하기 때문에 물맛이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막걸리나 맥주 같은 탄산을 함유한 발효주의 경우 생산지에서 가까운 곳이라야 제 맛을 낸다는 사실입니다. 독일 사람들을 예로 들면, 생산지에서 40㎞ 이상 이동된 맥주는 즐겨 마시지 않는 편이어서 지역 맥주가 그 지역에서 소비되는 것이 극히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막걸리 붐’이 일고 나서 맛있고 신선한 지역의 막걸리공장은 오히려 망해가고 대기업의 막걸리가 촌에서도 팔리는 웃지못할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기까지가 ‘싸구려 대중주’의 한계입니다.
우리 국민들의 술 마시는 패턴이 하루아침에 변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좋은 재료로 술을 만든다고 1~2년 내에 시장주도적인 술이 되지는 못한다는 말입니다. 와인의 경우를 봐도, 1999년 9월에 제가 와인교육을 시작하고 나서 2005년쯤 되니까 붐을 제대로 타기 시작한 것처럼 좋은 술이 나오고 4~5년의 기간을 거쳐야 입소문 및 제품의 다양화를 이룰 수 있을 테니까요.
좋은 술맛을 위한 재료로서의 ‘술쌀’의 중요성
그러기에 저는 재료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술쌀’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서론이 조금 길었습니다만 여러분들이 국내의 술을 이해하는데 조금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우리나라에선 아직도 술을 만들기 위한 쌀 품종을 개발해 본 적이 없습니다. ‘설갱미’를 국내 최초로 개발한 양조용 품종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밥쌀인 ‘일품벼’의 변종일 뿐이지 양조용 쌀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설갱미를 이용해 마케팅을 열심히 한다고 없는 술맛이 좋아질 리는 없습니다.
양조용 쌀은 일본에서 1890년대부터 품종 개발에 착수해 1920년대부터 실제 양조에 사용됐고, 현재는 100여 가지의 품종이 지역별 특성을 지닌 다양한 맛의 지사케(지역 술) 생산을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국내에선 필자가 속해 있는 ㈔농산어촌경관학회가 2011년에 양조용 품종 100여 가지 중 야마타니시키(山田錦), 고햐쿠만고쿠(五百万石), 미야마니시키(美山錦), 오마치(雄町) 등 4개 품종을 최초로 시험 재배했고, 올해에는 수확한 뒤에 이를 이용한 시험주를 만들어 볼 계획입니다.
양조용 쌀의 기본 조건으로는 첫째, 심백(心白·쌀을 쪼개면 나오는 흰 부분)의 비율이 높아야 합니다. 지난 호 연재에서도 설명 드렸지만 심백은 전분질이고, 전분질은 발효를 위해 가장 중요한 성분입니다. 또 지방이나 단백질과 달리 전분질은 잘 뭉치기 때문에 맑은 술을 만들기 위해선 다른 성분을 제외한 전분질만으로 술이 만들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밥쌀의 심백 비율이 30% 미만이라면 술쌀의 전분질은 70% 이상이고, 품종에 따라서는 85% 이상까지도 나옵니다. 특히 등숙기(쌀이 익어가는 시기)에 일교차가 좋은 지역일수록 심백의 비율이 높아집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양조용 쌀은 평야지대보다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의 일교차가 심한 중산간지역(100~500m 미만)이 재배적지인 것입니다.
둘째, 양조용 쌀은 겉은 단단하고 속은 탄력이 있어야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처럼 쌀을 이용해 맑은 술을 만들기보다 유통기한이 짧은 싼값의 생막걸리 위주로 생산하는 경우는 굳이 술쌀의 사용을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특히나 최초 술덧이 만들어졌을 때 알코올 도수 12%인 술을, 술 양과 같은 양의 물을 부어 6%로 싱겁게 만들어 출고되기 때문에, 아스파탐과 인공향신료 등으로 맛을 내는 현재의 막걸리를 위해선 술쌀을 사용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스파탐과 인공향신료로 맛을 내기 때문에 일부 대기업에선 술 만드는 기본을 아예 무시하는데, 고두밥(증기로 쪄낸 밥)을 사용하지 않고 뻔뻔하게 수입 팽화미를 사용하면서도 광고에는 ‘국내산 햇쌀’을 사용했다(몇 퍼센트를 사용했는지는 모르지만)고 하는 상황인데, 권한다고 해도 비싼 술쌀을 사용할 이유가 없을 겁니다.
이참에 우리 국민들에게 소득의 증가만큼이나 ‘음주의 선진화’를 권하고 싶습니다. 이제 제대로 된 재료로 만든, 몸에도 덜 해롭고 특성 있는 맛의 술을 권하고 싶습니다. 많은 분이 이런 술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가격 문제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시장 상황은 이 같은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고 변변하게 자랑할 술도 없게 된 것입니다. 주폭(酒暴)이 만연한 병든 사회, 술 먹고 한 일에 대해 너그러운 사회는 이제 끝내야 합니다.
겉이 단단하고 속이 탄력있어야 하는 또 하나의이유는 ‘도정의 필요성’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술을 만들기 위해 쌀의 전분질만을 사용하려면 최소한 쌀의 30% 이상을 도정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겉이 단단해야만 합니다. 또한 도정하고 남은 부분이 쉽게 부서져 싸래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탄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탄력이 있다는 것은 전분질에 기포가 많아 물이 잘 흡수된다는 것이어서 결국 발효에 상당히 유리한 조건인 것입니다.
도정 방식도 기존의 밥쌀 도정방식인 쌀끼리 부딪쳐서 도정하는 ‘마찰식 도정’이 아니라, 쌀의 모양을 따라 롤러로 도정하는 방식인 ‘원형정미’ 방식을 사용합니다. 일본주는 원료 쌀의 도정율에 따라 등급을 정하기도 나는데 보통 ‘양조용 쌀’로만 만든 술인 준마이(純米:순미)의 경우에는 30%를 도정한 재료를 사용하고, 좀 더 고급술인 준마이 긴죠(純米 吟釀:순미 음양)의 경우는 40%이상을 도정하고, 최 고급술인 준마이 다이긴죠(純米 大吟釀:순미 대음양)의 경우는 50% 이상을 도정한 양조용 쌀을 사용하는 것이 원칙으로, 도정을 많이 할수록 술 맛은 깔끔하고 숙성할수록 맛이 복잡해지는 특성이 있습니다.
셋째로 천립중(千粒重: 쌀알 1,000개의 무게)이 무거워야 합니다.
쌀 알이 크다고 무게가 더 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멥쌀의 무게와 찹쌀의 무게를 비교하면 크기에 상관없이 찹쌀의 무게가 더 나갑니다. 결국 ‘찰진’다시 말하면 밀도가 좋은 쌀이 무게가 더 나가는 것이지요. 이는 지방의 무게와 탄수화물의 무게를 비교하는 것과도 일치하여 같은 양의 지방보다는 탄수화물이 무게가 더 나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넷째로 산골 맑은 물로 관개(冠蓋)보다는 배수(排水) 위주로 키워져야 합니다.
농촌에 가 보면 모(耗)내기를 하고 나서 모의 상태가 다른 논보다 시원치 않다고 생각되면 바로 질소비료를 뿌리는 것이 관행입니다. 또한 논에는 항상 물이 차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우리의 농법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식물은 땅 위에 나와 있는 만큼 땅 속에 뿌리를 내려야 자연재해에 안전한 것이고, 잎과 줄기에 영양을 뺏기면 열매가 시원치 않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 벼의 키가 80cm 안팎인 점에 비추어 양조용 벼의 키는 1m가 넘는 것들이 허다합니다. 벼가 쓰러지기 쉬운 것입니다. 쓰러지면 한 해 농사는 끝입니다.
벼의 키 이외에도 벼가 잘 쓰러지는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질소비료의 과다한 사용으로 지력(地力:땅심)이 떨어진 것이 원인이고, 둘째는 뿌리가 활착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 원인입니다. 논에 물이 계속 채워져 있으면 뿌리는 물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결국 지상에는 1m 이상이 있는데 지하의 뿌리는 20-25cm 밖에 없어 무게의 균형이 맞지 않아 바람이 불지 않아도 벼는 쓰러지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예는 와인용 포도나무에서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지상의 자갈 등으로 재배환경이 척박하면 포도나무는 물을 찾아 뿌리를 깊이 내리게 되는 것이지요. 일례로 프랑스메독(Medoc)의 경우는 대체로 100m 정도 뿌리가 내려 있고, 지상에 어른 머리 만한 돌들이 많은 포도 농장인 샤또뇌프 뒤 빠프(Chateauneuf 여 Pape)간은 남프랑스 아비뇽(Avignon) 인근의 포도밭 같은 경우는 뿌리가 300m이상 내려 간 포도나무도 있다는 사실은 이를 잘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벼는 한 포기당 땅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영양이 한정되어 있고 잎과 줄기가 영양을 많이 취하면 열매인 쌀알은 부실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제 때 물을 잘 빼는 배수(排水)가 논에 물을 잘 대는 관개(灌漑)보다 중요한 것이고 이는 벼 뿐이 아니라 열매를 먹는 모든 식물에 동일합니다.
실제로 위에서 열거한 여러 가지 조건이 반영되어 일본에서의 양조용 쌀의 가격은 품종별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가격이 밥쌀보다는 60Kg 당 만엔(150,000원)정도 비싼 것이 일반적인 경우입니다. 결국 선전은 ‘국내산 햇쌀’로 만든다고 하면서 사실은 정부미나 수입 팽화미로 술을 만들고 있는 우리 막걸리 업계의 현황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재료인 것이 사실입니다.
일례로 양조용 쌀로 물을 안 타고 아스파탐 등 유해한 식품첨가제를 넣지 않고 막걸리를 만든다면 소비자 가격이 4,000원 내지 5,000원은 되야 할 텐데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이지만 반드시 가야 할 방향이기도 합니다.
지금 무주군의 논에서는 재배 2년째에 접어 든 국산 양조용 벼가 튼실하게자라고 있고 시험재배만 했던 작년과는 달리 올해는 시험주를 만들 생각입니다.
‘삶과 술’과 협의해서 원하는 독자분들께 10월 이후에 시음기회를 마련토록 하겠습니다. 현재의 계획대로라면 내년에는 양조용 쌀이 대량 재배되어 제대로 만든 국산 청주를 시음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점차 한 여름으로 진입하고 있고 복중이 누룩을 띠우기에 좋은 시기이니 다음 2회의 연재는 누룩이야기를 좀 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