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하 취중진담
한국인 술심으로 산다
모처럼만에 체증(滯症)이 뻥뜷리는 기분이었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던 지난 달 9월 30일 ‘가황(歌皇)’ 나훈아가 15년 만에 TV에 출연해 ‘대한민국 어게인!’을 외친 공연장에서 “살아오는 동안에 왕이나 대통령이 국민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본 적이 없다”면서 “국민이 힘이 있으면 위정자들이 생길 수 없다”고 말했다. 가황이 시대정신을 대변해준 느낌이다.
코로나19 때문에 우울하고, 염장 지르는 추 장관 때문에 짜증나고, 공무원 피살 때문에 분통이 터질 것 같은 마음이 일순간이나마 해소 되는 느낌이 들었다.
비롯, 지금은 현진권(1900-1943)이 <술 권하는 사회(1921년 작)>를 펴낼 만큼 일제 치하의 부조리한 사회도 아니고, 권일송 시인이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1966년에 발표한 시집)>에서 처럼 독재정권의 서글픈 시대도 아니다.
그런데도 가슴이 답답하다. 어딘가 꽉 막혀 있다는 느낌이다. 더군다나 코로나19로 맘 놓고 친구 불러내 회포를 풀기도 어려운 시기다. 이런 가슴을 가황이 뚫어주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이 돌아가는 정치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돌아가는 정치판을 보면 정말로 가관이다. 위정자(爲政者)들은 잘못은 모두가 네 탓이지 내 잘못은 하나도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국민들은 눈을 시퍼렇게 뜨고 본다. 누가 잘잘못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데도 남 탓만 한다. 물론 좌파의 근본이 내 잘못을 남에게 전가하는 것이 특기인줄 진작 알고 있지만 너무 한 것 같다.
현 집권 세력들은 야당과 보수언론 그리고 국민들을 개무시 하지 말고 이번 나훈아의 뼈 있는 충고를 새겨듣고 국민이 무서운 줄 알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국정감사도 국민들 마음 답답하기는 매한가지다. 여당은 감싸기 바쁘고, 야당은 헛발지만 하는 맹탕 감사만 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마땅치 않아 술로 화를 풀며 산다는 사람도 많다. 술은 기분 좋을 때 마셔야 약이 되고 기분 나쁠 때 마시면 독이 된다는 것도 알지만 그런 것 따질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요즘 ‘밥심 보다 술심’으로 산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밥심’은 ‘밥을 먹고 나서 생긴 힘’이다. 마찬가지로 ‘술심’은 ‘술을 먹고 나서 생긴 힘’으로 ‘술+힘’의 형태를 갖는다. ‘술힘’에서 ‘ㅎ’이 뒤에 이어지는 모음 ‘ㅣ’의 영향을 받아 ‘ㅅ’으로 바뀐 ‘ㅎ 구개음화 현상’으로 ‘술심’이 된 것이다.
예로부터 ‘밥심’이란 말은 많이 들어 왔는데 요즈음은 밥심은 물론 술심, 면(麵)심에 이어 디저트 심까지 생겨나고 있는 세상이다.
부언해서 술심을 측정해 보는 방법으로 농부들이 들일을 할 때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켜고 나면 힘이 솟는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체급을 가진 사람끼리 팔씨름을 해 보면 안다. 술을 마신사람의 힘이 세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술 마시고 할 수 있는 게임이 팔씨름이다.
한국인의 힘은 1998년 이후 줄곧 1위를 지켜온 것이 ‘백미’ 즉, 밥심이었는데 해가 갈수록 밥에서 얻는 열량 비중이 줄고 있다는 것이 보건복지부가 실시한 국민건강영양조사에서 나타나고 있다.
1998년 같은 조사에서 소주는 전체 에너지 섭취량의 1.2%를 차지하며 14위에 머물렀지만, 최근 조사에서는 에너지의 2.6%를 담당하며 5위로 뛰어올랐다. 밥에서 얻는 열량 비중은 감소하고 술에서 얻는 열량이 증가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는 않다.
최근 조사에서 ‘밥에서 얻는 열량 비중이 30%밖에 안 된다’는 발표에 “한국인은 밥심이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가 되었다.
남성들만 놓고 보면 백미, 돼지고기에 이어 소주가 3위로, 라면이나 빵 보다 앞서고 있다. 이런 결과 치를 놓고 보면 아무래도 한국 남성들은 ‘술심’으로 산단 말이 과언은 아닌 듯싶다.
밥보다 술을 마시는 사람들의 하소연을 들어 보면 밥벌이를 위해 술을 마신다는 것이다. 술 때문에 병에 걸렸다면 그들은 분명 밥 때문에 걸린 병이지 않겠는가. 그만큼 밥과 술은 얽힌 사연이 많다.
옛날 선현들은 ‘술 석잔 이면 대도에 통하고, 한말이면 자연에 합친다’고 했다. 주당들이 즐겨 하는 말이다. 취하지 않고 어떻게 세상을 논 한단 말인가. 마음 통하는 술친구 찾지 못하면 차라리 달밤에 국화라도 찾아 나서야 겠다. <본지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