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절제하라고 가르친 임금 세종

박정근 칼럼

술을 절제하라고 가르친 임금 세종

박정근(대진대 교수, 윌더니스문학 발행인, 소설가, 시인)

 

민중들에게 소주가 유행하기 시작한 때는 고려로 거슬러 올라간다. 몽골군은 유럽을 원정하면서 수메르인들이 최초로 만들었다는 소주제조법을 배웠다고 한다. 고려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몽골군은 일본원정을 위해 그들이 유럽에서 배워온 소주를 제조하기 위해 고려의 개성과 안동, 제주도에 소주 양조장을 만들었다.

즉, 소주 맛에 길들여진 원정군에게 술을 공급하지 않고는 전쟁을 수행하기가 어렵다는 전략적 판단이 수립되었던 모양이다. 몽골군은 일본원정의 긴 여정에서 양조장에서 만든 소주를 가죽 술통에 넣어 휴대용으로 마시는 방법을 창안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고려인들도 ‘물처럼 맑고. 맛은 매우 진하고 강렬한’(<본초강목(本草綱目)> 소주에 단번에 매혹됐다. 하지만 고려에서 소주의 폐해는 처음부터 발생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1376년 경상도원수 겸 도체찰사인 김진은 부하 장수들과 함께 기생들을 모아 밤낮으로 소주를 마셔댔다.

그들의 무절제한 음주를 목격한 장병들이 소주에 빠진 김진 일당을 ‘소주도(燒酒徒·소주의 무리)’라 하며 비난했을 정도였다. 결국 그는 왜구가 침략했는데도 불구하고 소주만 마시다 전투에서 도주하는 바람에 평민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피할 수 없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가진 소주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음주문화의 주류가 되었다. 그런데 소주가 가지는 폐해를 인지한 탓인지 세종은 절제를 하는 음주를 주장했다. 1422년(세종 4년), 정부와 육조가 세종 임금에게 일성으로 ‘소주’를 권했다고 한다.

그 당시 연일 비가 내려서 공기가 습하고 차가우니 세종이 종묘와 사직을 위해 건강을 위해 억지로라도 소주를 한 잔 들어 몸을 보호하라는 취지였다. 하지만 세종은 소주가 자신의 체질에 맞지 않다고 한사코 거절했다. 대신들은 임금의 건강을 위한 음주라는 명분으로 반복해서 간곡하게 청하였다. 끈질긴 대신들의 요청에 못 이겨 세종은 별 수 없이 소주잔을 들었다고 한다.

세종은 “그렇게 원한다면 할 수 없지.”라고 말하며 술잔을 들고 신하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모양을 취했다. 하지만 그는 역시 술 체질이 아니었는지 소주 반 잔 쯤 마시다가 잔을 내려놓고 말았다고 세종실록에 기록되고 있다. 결국 세종의 주량은 소주 반 잔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의 철학은 신하들의 요청을 들어주되 자신의 음주량은 철저하게 절제하겠다는 의지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즉, ‘세종식 술 마시기’는 ‘그칠 지(止)’의 힘을 발휘하는 음주방식인 것이다.

이처럼 세종은 술을 지나치게 즐기지 않았지만 술에 있어 신하들에게는 성군답게 매우 관대했다. 1533년(세종 15년) 이조판서 허조가 소주음주가 지나치게 유행한 나머지 나타난 폐해를 임금에게 고했다.

“술 때문에 몸을 망치는 자가 많습니다. 신이 벼슬에 오를 때는 소주를 보지 못했는데 지금은 집집마다 있습니다. 게다가 소주 때문에 목숨을 잃는 이가 흔합니다. 금주령을 내려야 합니다.” 마치 영국에서 청교도 혁명이후 금주령을 내리듯이 음주를 엄격하게 막자는 취지였다.

국민들의 건강과 미풍양속을 위해 금주령을 내리자는 허조의 주장에 대해 세종은 난색을 표한다. “엄히 금한다고 무슨 소용이겠느냐. 아마 막지 못할 것이다.(雖堅禁 不可之也)” 국민들의 음주취향을 국법으로 다스리자는 허조의 주장이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세종의 귀에 솔깃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세종의 대응은 신중하고도 인간주의적이었다. 금주령에 대한 세종의 신중론에 대해 만족하지 못한 이조판서가 “추상같은 금주령을 내리면 근절시킬 수 있다”고 재차 고했다.

하지만 세종은 금주령으로 지나친 음주풍습의 폐해를 신속하게 막으려는 허조의 주장과 민중들의 자연적 욕망 사이에서 적절한 절충 선을 제시한다. “그래도 술을 금하기는 정말 어렵다. 하나 정 그리해야 한다면 주고(酒誥·술을 경계하는 글)를 지어 신하들에게 내려주마.” 이것은 세종의 중용의 철학을 여실히 드러내는 정책적 판단이 아닐 수 없다.

세종은 생활고에 시달리는 민중들이 ‘소주 한 잔의 유혹’을 쉽게 뿌리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리라. 그는 술이 가지는 삶의 고통에 대한 치유력을 알고 있기에 부정적 영향을 이유로 금주를 하기 보다는 적당한 자제력으로 술을 즐기는 것이 옳다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태종에 따르면 세종은 술을 마시되, ‘중간에 적당히 그치는(適中而止)’ 절제력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태종실록 18/6/3). 양녕대군처럼 지나치게(過) 술을 마셔서 실수를 범하지도 않고, 효령대군처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해서 외국 사신들을 맞이하는 자리에 부족(不足)하지도 않은 ‘중용의 술 마시기’를 했다는 기록은 세종의 중용과 절제의 미덕을 설명하고도 남는다.

세종은 즉위한 다음에 국정 운영도 ‘적중이지(適中而止)’ 방식으로 실행했다. 어전회의에서 그는 항상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고 신하들의 의중을 먼저 묻는 전략을 구사했다.

임금으로서 먼저 나서서 자신의 지적 우월함을 자랑하고 싶은 생각이 없을 리 없다. 하지만 그는 신하들이 심중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게 하려고 중간에 끼어들고 싶은 유혹을 참고(止) 기다렸던 것이다.

중용의 철학을 가진 세종은 지략가이면서도 덕치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신하들이 충분히 심중의 이야기를 꺼내놓게 한 후 비로소 “경의 말이 참으로 아름답소”라고 치하함으로써 신하로 하여금 긍정적인 긍지를 느끼도록 유도하였다. 적절한 시점까지 충분히 기다렸다가 좋은 의견에 힘을 실어주는 ‘적중이지’의 화법 덕분에 그의 어전회의는 수많은 창의적 정책의 산실이 되었다. 어쩌면 적중이지의 철학이 담긴 음주가 그를 역사에 길이 남는 성군이 되도록 인도했다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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