音酒동행
별은 빛나건만, 생 클레어 파이오니어 블락 소비뇽 블랑
문 경 훈 교사(지혜학교)
어느 겨울, 연극영화과 학생으로 감독을 지망하던 선배의 추천으로 ’구스 반 산트‘ 감독의 ‘밀크’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인권운동가였으며 샌프란시스코 시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최초로 게이 정치인이 된 ‘하비 밀크(Harvey Bernard Milk)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다.
아무래도 성 소수자가 주인공인 영화다보니 보수적인 분위기의 한국에서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밀크로 분한 숀 펜의 명연기를 볼 수 있는 영화니 꼭 한번 보길 추천한다. 여튼 실존 인물인 하비 밀크는 불행하게도 1978년, 다른 시의원에 의해 살해당하게 되는데, 영화에서도 그 장면이 절정으로 그려진다. 살해당하기 불과 몇 시간 전, 애인과의 불화, 동료와의 갈등, 답답한 정치적 상황, 게이라는 이유만으로 가해지는 따가운 시선과 다수의 압박 등으로 심신이 피폐해진 밀크는 어두운 밤, 지친 몸을 이끌고 홀로 불 꺼진 집에 들어왔다.
사랑하던 애인은 이미 떠난 뒤였고 적막만이 그를 감쌌다. 불도 켜지 않은 채 낡은 턴테이블 위에 LP판을 올려놓고, 잔 가득 검붉은 와인을 따랐다. 그리고는 창밖이 보이는 작은 소파에 쓰러지듯 몸을 기댔다. 이윽고 적막한 분위기를 뚫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 3막의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E lucevan le stelle)’이었다.
E lucevan le stelle ed olezzava la terra
별은 빛나고 대지는 싱그러웠지
stridea l’uscio dell’orto, e un passo sfiorava la rena
정원의 문이 삐걱대더니, 길을 따라 발소리가 바스락대며 땅을 스쳤어
Entrava ella, fragrante mi cadea fra le braccia
향기로운 그녀는 다가와 내 품에 안기고
Oh, dolci baci, o languide carezze
오, 부드러운 입맞춤 오, 달콤한 어루만짐
mentr’io fremente le belle forme disciogliea dai veli!
나는 떨리는 손길로 베일을 벗기고 그녀의 고운 얼굴을 드러내었어
Svanì per sempre il sogno mio d’amore
아, 그 사랑이란 춘몽은 영원히 사라지고
L’ora è fuggita
시간은 모두 흘러가
E muoio disperato!
나는 이제 절망 속에 죽는구나!
E muoio disperato!
나는 이제 절망 속에 죽는구나!
E non ho amato mai tanto la vita!
이토록 삶이 절박한 때가 있었던가!
Mai tanto la vita!
이토록이나!
영화를 보는 당시에야 가사를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 했지만 그럼에도 이 한 장면에 난 완전히 넋이 나가버렸다. 오페라는커녕 푸치니의 ‘토스카’가 무슨 내용인지도 잘 모를 정도로 문외한이지만, 이 아리아만큼은 너무나 사랑한다. ‘별은 빛나건만’은 이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윤종찬 감독의 ‘파바로티’에서 주인공 역을 맡은 이제훈이 부르기도 하였는데 그때도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여튼 그 때부터 내 가슴속엔 ‘별은 빛나건만’을 틀어놓고 야경을 바라보면서 와인 마시기가 버킷리스트의 하나로 더해졌다. 내 인생에서 이뤄야 할 여러 가지 것들에 비하면 사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가능한 목표였다.
그리고 실제로 몇 년 후 서른 번째 생일을 맞은 나에게 스스로 주는 선물로 이 버킷리스트를 이루기로 했다. 우선 장소 선정이 중요했다. 야경을 그저 그런 곳에서 보고 싶진 않았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마침 유행하는 호캉스도 할 겸 서울에 있는 층수 높은 호텔을 예약했다.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은 내 인생 최고의 사치였다.
다음으론 와인이 중요했다. 처음엔 영화에서처럼 레드 와인, 그 중에서도
평소에 마셔보고 싶었던 ‘오 봉 클리마 피노누아’를 사려했다. 오 봉 클리마도 결코 비싼 와인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돈도 써본 놈이 쓴다고 이미 하룻밤 숙박에 너무 많은 돈을 썼다고 생각한 나에겐 조금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아예 다른 와인을 마시기로 했다. 평소에 즐겨하지 않던 화이트 와인이었지만 뉴질랜드의 ‘생 클레어 파이오니어 블락 소비뇽 블랑’이 평이 좋기에 망설임 없이 구매했다. 체크인이 가능한 시간이 되자마자 호텔로 들어가서 휴식도 취하고 술과 간단한 먹거리를 먹으며 저녁이 되기를 기다렸다. 밤이 되면, 불을 끄고 야경을 마시면서 아리아를 재생할 것이었고, 내 손엔 영화 속 밀크처럼 와인 잔이 들려있을 터였다. 기다리던 밤이 되었다.
내 앞엔 불 켜진 케이크가 있었고, 먹을거리와 심지어 축하해줄 사람도 있었다. 심혈을 다해 준비한 와인은 맛있었고, 서울의 야경은 기대만큼이나 예뻤다. 음악은 말할 것도 없이 여전히 훌륭했지만 이상하게도 기대만큼 벅찬 환희가 느껴지진 않았다. 죽음을 목전에 두지도 않았고 외롭지도 않아서 비장미가 떨어졌던 탓일까. 별로였냐고 물어본다면 분명 나쁘진 않았다.
그러나 기대했던 순간이었고 엄청난 투자를 했음에도 다른 좋은날들과 마찬가지로 적당히 좋은 시간으로 남았을 뿐이다. 그렇게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이뤄졌다.
어느 책에선가 이런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양로원에 머물고 있는 노인 분들이 가장 많이 돌아가시는 때는 명절 이후란다. 자식·며느리·손주들과 떨어져 외롭게 살던 노인들은 명절엔 가족들을 볼 수 있을 거란 기대에 하루하루를 희망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명절에 가족들을 만나고 그들을 다시 집으로 떠나보내고 나면, 이제껏 노인들의 외로운 삶에 에너지가 돼주었던 기대와 희망은 사라지고 그렇게 갑자기 에너지가 사라진 노인들이 명절 이후에 가장 많이 돌아가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족들을 못 만나거나 자주 못 보는 것과 같은 어떤 고통이나 괴로움보다도, 기대나 희망처럼 삶을 채워주는 에너지가 없을 때 인간은 쉽게 약해진다는 뜻이다. 일생의 버킷리스트라는 것도 어쩌면 이루는 순간이나 그 후보다,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시간이 더 행복하기 위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언제 이뤄질지 모르는 꿈을 갖고 살아가는 오늘이 사실은 제일 행복한 날이다. 몇 해 전 3월, 내가 생일 선물로 받은 값진 교훈이다.
◇ 필자 문경훈
▴1990년 출생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졸업▴한국전통주연구소 가양주반 수료
▴한국가양주연구소 전통주소믈리에 자격 취득 ▴한국가양주연구소 명인반 수료▴(현) 지혜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