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라 피츠제럴드와 옐로우 테일

엘라 피츠제럴드, 재즈의 여왕, 퍼스트 레이디, 20세기 최고이자 전설적인 재즈 싱어다. 풍성하고 따듯한 목소리로 자유자재로 구사한 스캣과 3옥타브를 넘나들던 가창력이 압도적이다.

音酒동행

엘라 피츠제럴드와 옐로우 테일

문 경 훈 교사(지혜학교)

 

신자유주의의 세례를 받은 세대가 세상에 나온 지도 어느덧 10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지금에야 신자유주의라는 말이 연일 회자되진 않지만, 그건 이미 세상이 신자유주의라는 숲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30여 년 전 대한민국이 이제 막 그 숲에 발을 내딛었을 때의 분위기는 지금과 사뭇 달랐다. 경제학자 우석훈은<88만원 세대>,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이 책에서 그는 신자유주의세대를 각개전투의 세대로 표현했다) 등의 책을 써내며 고통 받는 청춘에 위로와 조언을 건넸고, 각종 언론매체에서도 밀레니엄 세대의 비극에 관한 논설을 쏟아냈다.

비슷한 류의 글이 많이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유재인 작가의 <위풍당당 개청춘>이 기억에 남는다. 조금은 발칙한 제목과 쉬운 문체로 세대 당사자의 입장에서 쓰인 책이라 쉽게 공감이 갔다.

유재인 작가의 유쾌하면서도 어쩐지 슬픈 좌충우돌 일대기 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는데, 자본주의보다는 공산주의를 좋아하고 점심 식사 시간엔 식사 대신에 책을 읽는 직장 선배에 관한 글이었다. 유재인 작가는 그런 선배를 만나서 얼마나 행운인지 모르겠다고 했는데, 내가 생각해도 여러모로 신자유주의와는 어울리지 않는 멋진 사람이다. 그리고 나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공산주의를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점심 식사보다는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볕이 좋은 날이면 우리는 각자가 사랑하는 책 혹은 서로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을 가지고 공원에 나가 커피를 마시며 조용히 책을 읽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만화책을 양 손 가득 빌려서는 집 앞 호프집에 앉아 생맥주를 마시면서 한참 동안 만화책만 봤다. 만화책을 다 읽어갈 때쯤이면 둘이서 먹은 맥주잔이 테이블의 한 쪽을 가득 채워가고 있었고, 만화책 때문인지 술 때문인지 모르지만 옅은 흥이 잔뜩 올라 밤늦도록 이야기를 주고받는 날이 다반사였다.

생맥주보다는 병맥주가 맛있다는 사실을 나에게 처음으로 알려준 사람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는 병에 담긴 ‘카프리’를 제일 좋아했다. 물론 진실 여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난 여전히 병맥주가 더 맛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내가 본 최초의 채식주의 자였는데(물론 완전 채식은 아니었지만), 치킨 없이 맥주를 어떻게 먹냐고 말하던 내게 봄철 두릅이 맥주 안주로는 최고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주었고, 과연 그 말은 사실이었다.

사랑하던 강아지의 기일을 매년 챙기는 사람이었다. 그 날이 되면 그는 휴가를 내고, 소박하게 꾸며놓은 제단에 향을 피우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술을 마셨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함께했다. 아무리 술을 좋아했다지만 아침부터 소주는 좀 그렇고, 기일인데 맥주는 너무 가벼웠기에 보통 와인을 마셨다.

사실 난 그 전까지 와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사람에게도 난 와인은 싫다고, 비싸기만 하고 떨떠름하니 포도 주스보다 뭐가 맛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랬던 내게 와인이 다 비싸고 맛없기만 한 게 아니라고 차분히 알려준 사람이었다. 그때 그 사람과 마셨던 와인이 집 앞 편의점에서 산 ‘옐로우 테일’ 이었다.

벌써 근 10년 전의 얘기고, 그 날 이후로 옐로우 테일은 다시 마셔보지 않아서 사실 맛이나 향은 기억에 남아있지 않지만, 그래도 그 때 마셨던 옐로우 테일은 나쁘지 않았다. 그 사람 말 대로였다.

옐로우 테일 쉬라즈, 호주의 쉬라즈 와인으로 편의점이나 대형마트에서 만 원 대 초반에 구입할 수 있다. 가성비도 좋고 구하기도 쉽고 와인에 편견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그렇게 난 와인의 세계에도 발을 들이게 되었고, 지금은 정말로 와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글을 쓰기 위해서 ‘옐로우 테일’을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호주 쉬라즈였다. 지금도 호주 쉬라즈 품종을 선호하는 건 그 때의 기억이 무의식적으로 남아있어서일까?)

감히 장담하건데 술을 좋아하면서 음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음악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건 진짜 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선호하는 장르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와 그 사람이 그랬다. 그 사람에 비해 한참이 어렸던 난 그 당시 로큰롤에 빠져 있었다. 술에 취해선 같이 들국화의 노래를 듣다가, ‘제발’을 들으면서 울컥함을 토로하곤 했다. 당시 한창 유행하던 오디션 프로의 밴드판인 ‘탑 밴드’를 즐겨 보며 역시 게이트플라워즈라며 입이 닳도록 칭찬했었다.(그 때 공연했던 ‘꽃잎’은 정말 대단했다.)

더위가 한풀 꺾인 어느 여름날, 바다를 보러 간 을왕리에서 아델(Adele)의 ‘someone like you’를 조용히 따라 부르며 눈물도 흘렸고, 브로콜리너마저의 ‘보편적인 노래’를 들으며 수많은 이별 노래 중에서도 이 얼마나 탁월한 가사인지 무릎 치며 공감하기도 했다.

출퇴근하는 차 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김현철과 나미, 홍서범 등의 옛 노래를 같이 따라 부를 수 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또 그 사람은 재즈를 좋아했다. 어느 날처럼 그 사람과 술을 먹는데, 생소한 음악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너무나 아름답고 따스한 목소리였고, 여유롭고 물결이 굽이치듯 유려한 멜로디였다. 낮보다는 밤에, 그리고 소주보다는 와인에 너무나 어울리는 음악에 난 순식간에 홀리고 말았다. 그것이 ‘재즈의 여왕’ 엘라 피츠제럴드와 나의 첫 만남이었고 재즈라는 음악에 처음으로 취한 날이기도 했다.

20대 초반, 삶의 멋진 것들을 그 사람에게 배웠다. 살면서 다시 비슷한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멋진 사람이었다. 지금 내 나이는 그 때 그 사람의 나이를 목전에 두고 있는데, 난 누군가에게 그렇게 멋진 사람이 돼 있을까? 오랜만에 엘라 피츠제럴드의 노래를 듣고 있는 이 밤, 같이 듣던 노래가, 지새우던 밤이, 읽었던 책이, 깔깔대던 만화가, 그 때의 우리가, 그리고 당신이 그립다. 당신이 평생 내 글을 못 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 글을 당신에게 드리고 싶다.

◇ 필자 문경훈
문경훈
▴1990년 출생동국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졸업▴한국전통주연구소 가양주반 수료

▴한국가양주연구소 전통주소믈리에 자격 취득 ▴한국가양주연구소 명인반 수료▴(현) 지혜학교 교사

LEAVE A REPLY

Please enter your comment!
Please enter your name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