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의 음주문화 백태❹
폴란드 편
1960년대 폴란드 청년의 문화는 한마디로 만취문화
금주를 맹서한 사람들조차 결혼식에는 술을 마련했다
폴란드의 음주문화 변화가 폴란드 사회의 변화 선도
폴란드는 우리나라 사람들과 많이 닮았다. 처지나 음주문화 측면이 특히 그렇다. 사방이 강대국이다. 독일, 러시아 사이에 몰려있는 형국이다. 중국과 미국의 사이에 시이소오를 타야 하는 우리 사정과 유사하다. 따라서 역사적으로도 이웃에 당해왔다. 18세기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에 나라를 뺏기기도 했다.
우리 소주나 맥주를 다량 수출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삼성과 LG가 공장과 연구개발센터를 진출하고 있어, 일정 부분은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의 음주문화를 보면 우리 음주문화의 한 모습을 보고, 우리의 문화개선에도 시사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빨리 빨리 문화를 가지고 완샷(One Shot)!을 외치는 그들에게 우리 모습이 오버랩 된다. 그들을 보며 길을 찾아보자.
서구인들은 ‘술’하면 폴란드 사람들을 떠올린다. 폴란드 사람들의 과음행위는 자기 통제력을 잃고, 가끔 공격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주취자들이 경찰서에서 난동을 일삼는 우리 모습과 유사하다. 서구인들이 “폴란드 사람처럼 마신다”는 말은 그야말로 야성적인 술잔치를 의미하는 것이다. 술을 절제하지 않고 마시는 문화가 폴란드인들의 술문화인 것이다.
폴란드인들은 음주법이 전쟁과 관련이 있다. 스페인의 협곡에서 폴란드 기병대가 영웅적으로 돌격을 감행한 것을 본 황제가 “폴란드 사람처럼 마셔라!”고 말했다. 그런데 오늘날 그 말은 칭찬이 아니라 흉으로 변했다. 술에 대한 담론은 사회, 문화, 정치는 밀접한 관계가 있게 됨을 시사 하는 사례다.
◇폴란드의 양조업은 부의 원천
폴란드의 술 생산과 유통은 수세기 동안 집권자들이 통제했다. 중세 초에는 왕이 독점했다. 그렇지만 1300년대 말에 귀족들이 득세하자 주인이 바뀌었다. 폴란드는 다른 유럽의 국가들과는 달리 귀족 등이 왕을 선출했다. 1600년대에 이르자 술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다. 전쟁 때문에 곡물수출이 어렵게 되자 국내소비처를 주류생산에서 찾게 되었다. 동시에 증류기술이 발전하자 생산량이 늘었다.
우리나라의 소주처럼 자기지역 주류소비가 일반적이었다. 농노들은 자기 지역에서 마실 수밖에 없었다. 당시 폴란드의 술집은 다른 유럽지역과 유사했다. 1층에서는 술을 팔고 2층에서는 숙박을 하는 여관형태였다. 농노들이 술을 마시면 지주가 돈을 벌고, 다시 돈을 번 지주가 농노들에게 급여를 올려주는 그런 관계가 형성되었었다.
많은 귀족들은 술로부터 얻은 수입이 총소득의 절반에 가까울 정도로 컸다. 그러자 1800년대가 되면 술소비량이 1인당 9.6리터에서 38리터까지 치솟았다. 비룬(Wielun)지역에서는 48리터가 된 적이 있다는 통계도 있다. 폴란드에서 술 문제는 유태인문제와도 관계가 있다. 유태인들은 여러 제약 때문에 지방의 지주로부터 술집을 임대하여 경영했다. 제일교포들이 일본 대도시에서 빠찐코를 경영하는 상황과 유사하다.
이 때 농노들은 유태인들이 자신들에게 술을 팔아 이익을 챙기는 수탈자로 생각했다. 반봉건폭동 때 술집을 불태우기 까지 했다. 2차 대전 때 유태인 학살을 폴란드인들이 방관한 일도 이와 관계가 있다.
◇음주자유와 통제의 연혁
1800년대 중엽에 절주운동이 생겼다. 우리나라는 2000년이 넘어서야 절주운동이 가시화된다. 200년이나 차이가 난다. 폴란드의 절주운동은 종교나 정치와 관계가 깊다. 가톨릭 교구가 먼저 대학생 기숙사에 금주규범을 시도했다. 당시 전체 기숙사의 30-50%가 따랐다고 한다. 당시 폴란드는 3개국이 분할 통치 중이었다. 그 규범은 특히 러시아령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일부에서는 주민들까지 금주를 맹세했다. 그 이유는 절주가 나라의 독립을 줄 힘이 된다고 생각해서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절주운동은 사라져갔다. 그 후에는 사회주의나 노동운동에서 절주운동을 유지했다. 그 후 폴란드의 술 소비량이 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1인당 3.7리터 정도로 까지 크게 줄었다. 정말로 큰 변화가 생긴 것이다.
1918년 독립을 쟁취한 이후 술문제가 다시 문제가 되었다. 그러자 국회에서는 주류 판매 제한법을 통과시켰고 국가가 술생산을 독점했다. 국가는 음주연령제한, 판매점수 제한 등 규제를 도입했다. 금주 조항까지 있었다. 1930년경 술판매 금지지역이 전체의 10%에 달했다. 폴란드인들의 절주는 당시 금주법 시기의 미국과 같이 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렇지만 1930년대 폴란드의 금주운동은 그다지 강력하지 않았다. 돈이 필요해지자 정부에서 주류 과세에 기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술을 자유화하자 술 소비는 바로 늘어났다.
어느 국가든지 규제는 술 소비량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폴란드도 마찬가지다. 대 공황기에는 술 소비가 1인당 1리터 정도였다. 1938년의 자료를 보면 1인당 술 소비량이 1.5리터로 증가하였다. 한 것을 알 수가 있다.
전쟁 중에도 술 소비가 늘었다. 2차 세계대전 중 암거래가 늘었다. 암시장의 시장규모가 늘어난 이유는 전시중의 배급제도, 불안정한 심리상태 등이 이유였다. 밀조주 거래가 큰 규모로 늘어났다. 상대적으로 싼 가격으로 밀주를 사게 되었다. 동시에 나치 독일이 술 생산을 늘리고 증류주 쿠폰을 발행했다. 술의 소비를 늘려 폴란드인들을 약화시키려는 생각을 가졌다. 또한 폴란드 게릴라들도 전시에 술을 마셨다.
2차 대전이 끝나자마자 폴란드 군 당국은 불법 증류장들을 파괴했다. 근무 중에 술에 취한 병사들을 사형에 처하는 강력한 법도 마련했다. 음주량이 줄면 늘리고 늘면 다시 규제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사회주의 시기에 늘어난 술 소비
폴란드의 음주사회사는 전후에 시작되었다. 1944년 국가가 술을 다시 독점하자 절주운동은 가라앉았다. 절주운동 단체들도 통폐합되었다. 결국 ‘폴란드 국립 반알코올위원회(The Polish National Anti-Alcohol Committee)’하나만 남았다. 처음에 정부는 술문제를 자본주의의 잔재라고 하였다. 사회주의가 진보하면 사라질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현실은 달랐다. 만취자들이 증가했다.
특히 노동자 계급에서 주정뱅이들이 증가했다. 새로운 사회주의 시스템의 상징인 거대 건설공사에서 노동자가 증가했다. 노동은 음주를 불렀다. 1950년대 중반 정치적 해빙기 때 술 문젣가 과제로 등장했다. 미국의 질병이론은 늘어나는 폴란드의 알코올 문제를 설명하기에 적합했다. 사회주의가 양산한 만취 노동자는 사회주의의 사회적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질병문제가 된 것이다.
폴란드 법은 알코올 의존 자들을 범죄자가 아니라 치료대상으로 보았다. ‘만취자 쉼터’도 생겼다. 술이 깰 때까지 보호를 받는 곳이 50년 전에 생긴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지금도 제대로 된 쉼터가 매우 적다. 알코올 의존자들이 보호의 대상이 되었다. 게다가 술문제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일로 보았다. 폴란드에서는 알코올 의존자들이 비난받지 않게 되었다.
알코올 문제가 의료 문제로 되자 초점이 바뀌었다. 폴란드에서 술 문제는 공공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술 문제는 합법적인 검열의 대상이 되었다. 사회문제가 되는 것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 말의 어느 여름, 유명한 ‘솔리더리티운동(Solidarity Movement)’의 태동을 촉발한 파업이 일어난 후에 술문제가 다시 사회문제가 되었다. 세상이 또 변한 것이었다. 사회운동과 함께 과제가 되자 술 문제는 정치문제로 변했다. 사회주의가 국민들을 술 마시게 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세금을 더 걷기 위해서 국민이 술 중독자가 되도록 조장하였다는 혐의를 받게 된 것이다.
실제로 음주량도 늘고, 역학조사 결과로도 입증되자 정부는 할 말이 없어졌다. 전쟁 후 술소비량의 증가는 서구 모든 나라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술 문제가 늘어난 것에 대해 정부가 변호할 근거가 없었다. 정부는 술판매를 통제할 수밖에 없었고 생산량도 줄였다. 어쨌든 당시 폴란드에서 술 소비 증가는 생산성의 하락과 무질서를 낳았다.
◇과거 음주문화가 수백 년을 지속한 폴란드
폴란드인의 과폭음은 봉건시대에 시작되었다. 그 이후 서구의 술소비 패턴이 폴란드로 유입되었다. 1800년대 중반에 1인당 술 소비량은 12리터였다. 1차 세계대전 전에는 4리터로 줄었다. 전쟁 중에는 2리터로 더 줄었다. 2차 세계대전 후에 1950년에 3.0리터, 1980년에 12리로 다시 늘어났다. 1980년대 초에 12리터 정도였는데 2010년대에 다시 그 수준을 회복했다.
폴란드인들은 과거 독한 증류주를 주로 마셨다. 우리가 소주를 마신 것과 같다. 1938년에는 증류주가 술 소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88%, 1950년대에는 78%, 1960년에는 60%로 계속 줄었다. 다시 1880년대 초에 최고 수준에 갔다가 다시 꾸준히 줄어들었다. 과거에 와인과 맥주는 소비량이 적었지만 이제는 맥주가 가장 많이 소비된다. 그 다음이 증류주이고 와인은 가장 소비가 덜 된다.
1990년대에 맥주소비량이 크게 는 것은 서구사회와 같다. 그래도 폴란드인의 정서에 맞는 술은 보드카라고 보는 것이 옳다. 하지만 정서와 실제 소비는 다르다. 음주빈도는 다른 유럽인들에 비해 많지 않았다. 1980년대에 조사된 자료를 보면 1달에 1번 정도 술을 마셨다. 하지만 남성의 40%정도, 여성의 20% 정도는 1주일에 1번이나 그 이상 마시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2010년 자료로는 음주하는 남성의 1인당 소비량이 무려 31.5리터에 달한다. 여성도 14리터로 적지 않은 양이다. 폴란드인들은 술을 단숨에 마신다. 그래서 심하게 취하는 경우가 많다. 폴란드의 귀족들은 게으른 생활방식과 부를 표현하는 일이 음주였다. 과음은 귀족들의 권리이자 의무였던 것이다. 폴란드의 노래가사에 “술을 바닥을 보지 않는 사람은 회초리로 두 대를 맞아야한다”, “그는 마셨다. 그는 바닥까지 다 마셨다. 신이여! 그를 축복하라!”라는 것이 있다. 심지어 한 번에 마시지 않는 경우 농으로 모욕을 주는 풍습까지 있다고 한다.
1700년대에 손잡이가 없는 와인 잔이 유행하였다. 술을 받으면 한 번에 다 마시라는 의미였다는 것이다. 술 마시기 대회도 있었고 잘 마시는 사람은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폴란드의 왕 아우구스트 2세는 우승자에게 ‘흰 독수리’를 하사하기도 했다. 폴란드인들의 폭음은 당연한 일이 된다.
이러한 음주패턴도 해가 감에 따라 변해갔다. 1960년과 1980년 조사결과를 비교해보면 1인당 음주량은 두 배로 늘었는데 한 번에 보드카를 200그램 이상 마시는 사람이 60%에서 30%로 줄었다. 놀라운 변화였다. 1980년대에 8리터에 달하던 증류주 소비는 2010년에는 4리터정도로 줄었다. 절반이 준 것이다.
◇도시화와 산업화가 늘린 폭음과 과음
폴란드인들의 음주행태도 산업화와 도시화로 변한다. 2차 세계대전 전에는 인구의 2/3가 지방에 살았지만 1990년대에는 70%가 도시에 살게 되었다. 1950년대 도시화와 산업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자 문화도 크게 변했다. 도시로 이주한 지방민들은 전통적인 음주행태를 도시로 가져왔다.
농사와 달리 제조업의 노동시간은 정해진 것이었다. 정기적으로 봉급을 받는 젊은 이주민들에게 퇴근 후 여가시간에 과음을 일삼게 되었다. 농사일을 할 때에는 일요미사 후 술집으로 갔지만 이제는 매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도시에서는 자신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사회적 통제도 없고 시간과 돈이 생기자 술을 마신 것이다. 사회주의 탓이 아니라 시간과 돈 탓이었다. 이주민들의 숙소에는 몇 명이 공동생활을 했다. 공동생활은 만취, 폭력, 범죄를 발생시켰다. 작은 숙소의 생활, 공장에서의 긴장과 피로는 자연 폭음을 유도했다.
폴란드의 여성은 원래 술과 거리가 멀었었다. 우리나라 시골처녀들과 다름이 없었다. 1700년대의 폴란드인 남성들은 술을 거절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여성들은 적당하게 마시거나 잔에 입을 대는 정도로 그쳐야 했다. 남성들에게는 큰일 날 일이었지만 여성들은 테이블 밑에나 접시에 술을 버리기도 했다. 그런데 여성들에게 변화가 일었다.
1960년대 자료에는 여성은 남성의 1/7정도를 마셨다. 그런데 1989년에는 1/4→1/5로 줄었다. 1960년대와 1980년대 사이에 여성음주는 300%가 증가했고, 남성음주는 75%가 증가했다. 여성음주의 증가는 전후 여성해방과도 관련이 있다. 1950년과 1990년 사이에 여성노동력이 30%에서 46%로 늘었다. 그 이후 더 는다. 의사, 교사들은 여성이 80%를 점했다.
특히 1950년대에 여성은 남성과 같은 직업을 갖도록 하였다. 그 당시 트랙터가 여성의 사진이 담긴 포스터를 붙이고 폴란드의 들녘을 달렸다고 한다. 폴란드 여성이 오락, 성해방, 흡연, 음주를 즐겨 지위변화를 상징했다.
◇청년들의 음주문화
전후는 소수민족, 하층민, 여성, 청소년 등의 해방기였다. 여성은 남성들의 행동을 모방했지만 청소년들은 다른 가치를 추구했다. 1968년에 학생 폭동이 있었다. 공산당의 정의, 평등, 자유가 현실과 다르다는 것이 이유였다. 시위는 전국으로 파급되었다. 한 달이나 시위는 계속되었고 폴란드의 청년들은 별도의 세력으로 분류되었다.
그들은 성해방, 술과 마약의 사용 등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냈다. 1960년대에 폴란드 청년의 문화는 한마디로 만취문화였다. 부모세대가 보드카를 마셨지만 청년들은 맥주와 와인을 마셨다. 그들은 도수가 낮은 술을 마셔 평화롭고 비폭력적인 문화라는 상징을 창조하였다. 1960년과 1980년 사이에 10대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청소년 음주량이 많고 금주자들이 적은 것으로 밝혀졌다. 1890년대부터 청소년음주는 폴란드 어른들의 관심사였다. 2010년 자료를 보면 미성년자 음주자가 26%이고, 남성은 35%, 여성은 18%가 음주자였다.
폴란드의 법적 음주연령은 18세이다. 이는 정부와 가톨릭교회가 강요하는 것이다. 세례를 받을 때 금주맹세를 시키고, 부모들이 규범을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쉽지가 않다. 1984년도의 조사 자료를 보면 40%의 부모들은 술에 대해 자녀들과 언급이 없었다고 적혀있다. 폴란드 어른들의 술 친화적 사고와 태도가 청소년 음주를 막지 못한다. 부모들이 청소년 음주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보면 옳다.
◇술에 관한 폴란드인들의 허용과 태도
폴란드에서 ‘직업이 귀한 사람들이 술을 덜 마실 것’이라는 가설이 입증 가능할까? 1984년과 1989년에 실시된 전국조사에서 술을 덜 마실 것으로 기대되었던 직업은 신부, 경찰, 의사, 교사, 판사, 당 간부, 군 장교, 기자, 금융기관 종사자 등이었다. 노동자와 농민은 많이 마실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렇지만 과연 그러했을까?
1984년에 당 간부들의 53% 정도가 건전한 음주를 한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1989년에는 그 39%로 적정음주자가 줄었다. 다른 직업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가 않았다. 사회 규범과 음주량 수준 사이에 어느 정도 관계는 있다.
가장 폴란드에서 술을 많이 마시는 직업은 육체노동자들이다. 그 중 비숙련 노동자의 경우 더 많이 마신다. 농부가 그 다음이다. 사무직 노동자들과 대학 교육을 받은 전문직 종사자들은 덜 마시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사회 통념상 낮은 계층의 직업종사자들에 과음자나 폭음자들이 많다.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과폭음자가 적지만 상대적으로 금주자도 적다. 그 이유는 서구의 유행을 좇기 때문이다. 한 번에 많이는 안마시지만 음주빈도가 높다.
이제 폴란드에서의 음주방식과 음주량은 개인이 선택하도록 변했다. 여성도 청소년도 술에 대해 자유롭고 모든 직업종사자들도 마찬가지다. 직업상 힘든 정도에 따라 집단적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이제 그것도 개인의 의지에 따라 차이가 난다. 음주문제는 폴란드인들의 문제가 더 크다. 정신장애, 폭력, 공공장소에서의 만취행위 등은 심각하다.
1980년대의 실태조사에는 숙취, 두통, 위장장애 등이 많았다. 국제기준인 지난 12개월간의 음주문제 조사에서 응답자의 1/3이상이 그러한 고통을 호소했다. 10%정도 문제가 있는 것으로 조사된 사항도 간단치가 않다. 가정폭력, 강도, 재산상의 큰 피해 등이 그것이었다. 술로 인한 많은 즐거움이 있었다는 폴란드인들도 많았다. 60%이상의 폴란드인들은 술 때문에 분위기가 살았다고 하였다. 50% 이상은 긴장이 줄었다고 했고, 동료들과 가까워 졌다는 경우도 25%가 되었다.
이성문제에도 도움이 되었다는 사람도 12%나 되었다. 감기나, 두통, 위장장애를 없애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는 경우도 각각 20%, 8%, 13%나 되었다. 폴란드인들에게는 술이 인생살이에 도움이 되고, 심지어는 간단한 질환의 처방으로까지 사용되고 효과가 있다고 믿는 물질이었던 것이다.
원래 폴란드 사람들은 인생사의 중요한 이벤트에 반드시 술이 있다. 술 문제가 있어서 금주를 맹서한 사람들조차 결혼식에는 술을 마련한다. 술은 건강, 우정, 솔직함, 어른에 대한 공경 등 중요한 모든 사회생활에서 의미 있는 물질로 인정이 되고 있는 것이다. 술은 사회 모임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고, 가족을 단합하게하고, 친구들의 우정을 깊게 하고, 이웃이나 동업자들 간의 관계를 돈독하게 만든다. 즉, 대부분의 폴란드인들은 사회적인 이유로 인해 술을 마신다. 폴란드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일은 아주 예외적인 ‘사건’이다.
사실 폴란드의 문화는 술 마시는 문화였다. 그런데 1840년대 경에 절주를 해야 한다는 정서가 처음 나타났다. 워낙 많이 마셨기 때문이었지만 폴란드의 음주문화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19세기 중반에 이미 폴란드인들은 사회문제를 논하면서 알코올리즘에 대한 사고를 가졌다. 그러자 전통적으로 술을 마셔야만 하던 행사들을 술 없이 치루기도 했다. 가톨릭교회가 먼저 세례와 성찬식에서 술을 없앴다. 가톨릭교회의 행사에서 술을 마시는 경우는 극히 일부가 되었다.
1950년대에 노동절 축하연이 술 없는 파티가 되었다. 노동절 날의 금주는 정부차원에서 선포를 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정치적인 데에도 있었지만 변화가 분명히 있었다. 노동절이나 다른 몇몇 경우에 행해지던 공식 축제행사가 사라진 것이다. 술이 없으면 축제를 할 재미가 없다는 상황이 폴란드에서 입증된 것이다.
더 두고 볼 일이다. 지금 정확한 사실은 폴란드의 공공행사에서 술이 점차 입지를 잃고 있다는 것이다. 무조건 술 마시는 사회였던 폴란드도 1990년대에 와서 크게 변화하고 있다는 해석은 틀림이 없다.
2000년 초반에 줄어들던 음주량이 다시 늘었다. 하지만 주량과 빈도가 늘었다 해도 저도주 위주의 새로운 음주문화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2010년 자료에 폴란드에 남성 금주자가 15.8%. 여성금주자가 21.2%나 된다고 조사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진정 ‘폴란드사람처럼 마시라!’고 외쳐야 할 상황이 늘고 있는 것이다.
폴란드의 음주문화 변화가 폴란드 사회의 변화를 선도하고 있다. 술을 안 마시는 상황이 아니라 적당히 마시고 즐길 수 있는 정황을 만들어 가고 있는 모습이 오늘의 폴란드가 아닐까. 과음과 폭음을 일삼던 폴란드가 적당히 마시는 국가로 변할 수 있다면 소위 음주문화의 근본적 개선이 가능하다는 역사를 기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