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하의 취중진담
술꾼은 술병을 세지 않는다
과거 직장 상사 였던 분의 닉네임이 ‘소주 반병’이었다. 이 분은 술집에 가면 주당(酒黨) 수에 관계없이 소주 반병을 시킨다. 주당이 2명일 때는 그런대로 넘길 수 있지만 3명, 4명일 때는 주변을 둘러보게 만든다. 창피하니까. 오죽하면 술값이 없어 반병을 시킬까 하는 눈총을 받을까 봐서였다.
‘소주 반병’의 속사정은 후에 알았다. 60년대 소주는 거의 30도짜리에다가 4홉(720㎖)짜리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웬만한 주당이 아니고선 소주 한 병을 다 마신다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다. 그래서 손님도 술집 주인도 소주 반병이 일상화 되던 시절이었다. 이분이 술을 시작할 때가 60년대이니까 몸에 밴 ‘소주 반병’ 습관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소주의 알코올 도수가 내려가고 2홉(360㎖)짜리가 보편화 되어서도 바뀌지 않았다.
처음 간 식당에서 습관처럼 소주 반 병(2홉짜리)을 주문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 받기 십상이어서 단골 식당이 아니면 잘 가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소주 반병’과 술을 마신 날은 대취(大醉)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령 3명이 모인 자리라면 소주 반병이라야 한 잔 씩 마시면 금세 바닥이 난다. 그러다 보면 ‘반병 더요’를 외친다. 술자리가 파할 때쯤이면 테이블 위에는 소주병이 즐비하다. 반병을 얕잡아 본 결과다.
요즘은 그럴 리 없겠지만 60-70년대에는 사윗감을 테스트 할 때 술을 마실 줄 아느냐 여부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었다. 남자라면 술 한 잔 할 줄 알아야 사회생활을 원활하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이 강했었던 시절이었다. 남자가 술 한 잔도 제대로 못 마시면 큰일 못한다는 생각이 상식처럼 통하던 때였다.
지금보다 옛 사람들은 술이 인간관계에 있어 윤활유 역할을 하고 있어 술을 못하면 사회생활에서 뒤처질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 장인 된 입장에서는 사위 앉혀놓고 주거니 받거니 할 수 있는 장래 술친구(?)로서 사윗감을 얻는 것이 로망일 수도 있고 장모 입장에서는 지나치게 술을 마시면 딸이 고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사윗감 테스트에 술이 동원되곤 했다.
술이란 게 참으로 요상한 물질이다. 딱 한잔만 마신다는 게 두 잔이 되고 석잔 이 된다. 한 병이 두병 되고 세병이 된다.
조지훈 시인(1920.12.3-1968.5.17)도 ‘술은 인정이라’(1956)는 글에서 “제 돈 써가면서 술 안 먹어준다고 화내는 것이 술뿐이요, 아무리 과장하고 거짓말해도 밉지 않은 것은 술 마시는 자랑뿐이다.”라고 했다. 그러다 보니 주석에서 그만 마시자고 선언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고, 다음에는 술이 술을 마시고, 술이 사람을 마신다’는 말이 법화경의 경구에도 나오는 것을 보면 술을 마시다가 중단 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닌 듯싶다.
코로나펜데믹 시대다. 술집서 마음 놓고 회포도 풀지 못한다. 가끔 TV화면에는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밀실에서 술 마시던 주당들이 단속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들은 코로나 방역지침 위반으로 처벌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도 마신다. 술이 유혹하는 것일까. 알코올 중독자가 아니더라도 술이 당길 때는 걸리는 것은 뒷전이 아니겠는가.
젊었을 적 이야기다. 술값 걱정하지 않는 선배가 술 한 잔 하자기에 따라 나섰다. 당시 무교동의 어느 선술집이었는데 술자리를 파하고 나니 마신 맥주병이 온 방에 가득했다. 당시 풋술내기 이었던 필자는 많이 마시는 것이 잘 마시는 것으로 여기던 시절이다.
만약에 인간사회에서 술을 모두 없앤다면 어떤 세상이 될까?
평화롭고 화목한 세상이 될까, 아니면 삐걱거리며 악다구리만 치며 사기꾼 노름 쟁이 오입쟁이 같은 사람들로만 득실거리는 세상이 될까?
사기꾼 노름 쟁이 오입쟁이들은 술을 마실 줄 알되 사기를 치거나 노름을 하거나 바람을 피울 때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한다. 술 취하면 진심이 드러나니까. 이난처럼 취중진담이 될 수 있어 사기꾼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한다.
술은 모든 범죄의 아비요, 온갖 혐오스러운 것의 어미라고 했다. 이런 말도 있다. “술이 사람을 못된 놈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놈이 원래 못된 놈이라는 사실을 술이 밝혀주는 것이다.” 그래서 사윗감 테스트로 술을 이용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진정한 술꾼은 술병 세지 않고 무작정 마시는 것이 아니라 정도껏 마시는 문화가 필요해진 시대가 되었다. 그래야 건강도 챙기고 칭찬도 받을 수 있으니까.
삶과술 발행인 tinew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