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프들과 제주술을 맛보다

셰프들과 제주술을 맛보다

 

허시명의 주당천리

 

제주와이너리 감귤주 귤로만의 발효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김성배씨(오른쪽)제주 신라호텔에서 호텔 셰프(조리장)들의 모임이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조리장들을 위한 막걸리 강좌를 의뢰받아 2시간 동안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1시간 정도 막걸리 문화를 논하고, 또 1시간 동안 막걸리를 맛보면서 그 맛과 품질에 관한 얘기를 주고받았다. 시음 후 “역시 우리 동네 막걸리가 최고”라고 말하는 대목에선 “조리장들이라고 해서 특별히 술을 더 잘 아는 것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했고, 시음한 술을 식전주와 식중주와 식후주와 칵테일로 구분해낸 이를 보고서는 “조리장답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 술의 문제점 하나를 지적하면, 음식 만드는 사람이 술을 만들지 않고 술을 만드는 사람이 음식을 만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분업이 되어 좋아 보이는 것 같지만, 음식과 술의 교류가 그만큼 경직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요리에 사용되는 술을 만드는 요리사는 아주 희귀한 존재가 된 것이다. 막걸리 식초를 만들 수 있는 요리사도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이다. 결국 조리장들은 술을 이용한 음식과 향료를 통한 맛의 다양성을 추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조리장들을 위해 내가 준비한 시음용 막걸리는 모두 8종류였다. 감미료를 넣지 않은 용감한 태인 양조장 막걸리, 명품 김포금쌀로 만든 막걸리 선호, 병 디자인이 좋아 호텔에 내놓을 만한 맑은내일 쌀막걸리, 국내에서 가장 긴 시간 동안 발효와 숙성을 시켜 만든 자희향 탁주가 육지에서 선발되었다. 제주도로 술을 주문하면서 맛이 변할까 우려했는데, 택배비를 약간만 더 물면 비행기편을 이용할 수 있어서 크게 문제되진 않았다.

그리고 절반인 4종류의 술은 제주도에서 구했다. 제주도에 왔으니 제주술을 맛보는 것은 예의라 여겼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선택한 제주술은 제주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는, 막걸리를 좋아하는 화가 친구의 도움을 받아 구입했다. 화가 친구가 추천한 술은 모슬포장에서 파는 오메기술이었다. 오메기술은 제주를 대표하는 술이다. 좁쌀오메기떡을 만들어 뜨거운 물에 익힌 뒤, 건져내 주걱으로 치대어 으깬 다음 식혔다가 보리누룩가루와 섞어 빚는다. 모슬포장에서 파는 오메기술은 칠순을 넘긴 동네 할머니가 빚은 것인데, 신맛이 약간 돌긴 하지만 맛이 조화로워 술 빚는 이가 아주 깔끔하고 순한 성품을 지녔으리라 짐작되었다. 술을 파는 시장 주인은 조심스럽게 위에 떠있는 맑은 술을 맛보여주고 나서 휘휘 저어 탁한 술을 병에 담아주었다. 오메기 탁주는 묵직하고 구수하고 감칠맛이 돌았다.

제주 신라호텔에서 셰프들이 시음한 막걸리제주의 두 번째 술은 제주사람들이 가장 많이 마시는 막걸리였다. 제주탁주에서 만든 쌀막걸리인데, 육지의 도회지 막걸리 맛을 따라간 술이었다. 탄산의 청량감이 있고, 맑고 가벼운 술이었다. 물빠짐이 좋은 화산토인 제주에는 논이 거의 없다. 벼농사를 짓기 어려워 밭에서 좁쌀과 보리쌀 농사를 주로 빚어 양식으로 삼았다. 제주도에 좁쌀술이 많고, 보리누룩이 흔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하여튼 제주에서도 육지술을 흉내낸 쌀막걸리가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술은 제주감귤 탁주였다. 상품화되고 있는 제주의 술중에서 가장 제주다운 술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선택한 술이었다. 제주와이너리에서 제주 감귤 100%로 빚은, 알코올 6%와 10%의 감귤주 ‘귤로만’이다. 감귤주 귤로만을 구하기 위해서 제주시 애월읍에 있는 제주와이너리를 찾아갔다. 감귤주를 빚고 있는 사람은 올해 80살이 된 김성배 씨였다. 그는 서울 왕십리의 금녕양조장에서 일했고 강원도 평창의 감자술과 전라남도 영광의 아랑주 제조에 참여했다가, 2001년 제주로 옮겨와 살면서 감귤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에게 감귤주를 만드는 이유를 물었다. 그는 과일 중에서도 감귤에 비타민이 많고, 색깔도 고운 데다 새콤달콤한 맛이 있어서 술 빚기에 좋다고 했다. 더욱이 제주에서 많이 생산되는 온주밀감으로 만들기 때문에 의미가 크다고 했다. 술 이름이 귤로만이 된 것은 말 그대로 귤로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귤을 압착해 즙을 내고, 그 즙에 보당해 효모를 넣고 알코올 6%와 10%짜리 와인타입의 탁주를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감귤주는 탁주로 구분되지 않고 기타주류로 분류돼 있었다. 주세법에 따르면 과일을 발효시켜 막걸리를 만들 수 없다. 막걸리의 재료로 과일을 사용할 수 있지만, 그 경우 알코올분 1% 미만의 과일즙을 넣게 돼 있다. 과일을 발효시켜 만든 술은 와인, 즉 과실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즉 김성배 씨가 만든 귤로만은 과실주이지만, 그 빛이 탁해 탁주라는 별칭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막걸리 바람에 편승한 게 아니라, 막걸리 바람이 불기 전부터 사용한 이름이다.

이제 막걸리는 한국음식을 이해하는 키워드가 됐다김성배 씨는 나를 발효실로 안내하더니, 한창 발효 중인 술들을 보여주었다. 술통 안의 술덧은 진노란 귤색으로 매혹적이었다. 그가 만드는 감귤막걸리는 육지에서 만든 것과 그 맛과 향이 확연하게 달랐다. 시중에서 판매되는 일반 감귤탁주는 쌀이나 밀가루에 누룩을 넣고 빚다가 완성 단계 즈음에 감귤즙이 첨가제처럼 조금 들어가는 정도라서, 감귤 향만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김성배 씨는 13% 감귤와인도 만들고, 제주의 특산물인 백련초로 빚은 와인도 만들고 있었다. 팔순의 나이에도 새로운 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그의 모습을 보자, 제주에 와서 제주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 조리장들에게 감귤주는 그리 높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술 속에 감귤맛이 덤덤하게 남아있어서였다. 조리장들은 감귤주스와 감귤주의 차이가 더 분명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감귤주에서 나는 효모의 향도 조금은 생경해했다. 하지만 따뜻한 격려의 말을 잊지 않았다. 감귤주 귤로만은 호텔에서 칵테일로 만들기 적합한 술이라는 평가였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술 그 자체만 보는 게 아니라 그 술과 어울리는 음식을 통해서, 그 술에 어울리는 음주법에 의해서 술을 새롭게 해석하는 능력을 가져야 하는데, 그날 신라호텔에서는 그런 능력을 지닌 조리장들이 있어서 제주 술과 막걸리를 즐겁게 맛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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