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音酒동행
술 마시러 주부가요
문 경 훈 교사(지혜학교)
‘코비드-19’라는 감히 상상하지 못한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집어삼킨 지도 어느새 2년째에 접어들었다. 우리에게 원치 않던 많은 변화가 찾아왔는데 간결하게 개인의 파편화·원자화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십 수 년 전보다야 덜하지만 그래도 매년 명절이면 민족대이동이라고 불리던 귀성행렬도 그 여파로 수그러들었고, 급기야 어느 시골 마을에 ‘아들아~이번 명절엔 안 찾아와도 된다.’는 내용의 현수막이 걸려 한층 더 씁쓸함을 자아냈다. 이런 이유로 올 추석에도 멀리 가지 않고 조촐히 가족끼리 보냈을 집이 많았으리라 생각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밥을 안 먹었고 추석 음식이 마련되지 않았을까.
지속적으로 환기되는 여권(女權)에 대한 인식 덕에 상황은 많이 나아졌겠지만 그도 어느 정도의 연령대까지의 이야기일 것이다. 매년 명절이면 고강도의 육체적·정신적 노동에 시달렸을, 규모는 작아졌지만 이번 명절에도 가족들을 위해 묵묵히 주방에서 시간을 보냈을 우리네 어머님, 주부님들을 위해 노래와 술을 바치려 한다.
시계를 한참 뒤로 돌려 아레사 프랭클린의 ‘respect’는 어떨까. 모두가 금세기 최고의 가수로 손꼽는 아레사 프랭클린의 앨범 ‘I never loved a man the way I love you’ 에 수록된 곡으로 1967년 발표된 곡이다. 말할 필요 없을 정도의 명곡으로 각종 차트를 휩쓸었음은 물론 현재도 많은 이들의 입에서 불리는 노래다. ‘respect(존경)’라는 의미답게 당시 흑인들이 인권운동 그리고 여성운동의 현장마다 목청껏 불렸는데 다른 가사는 몰라도 리스펙트와 후렴구의 R-E-S-P-E-C-T만큼은 용기 내어 따라 불러보길 권한다. 아레사의 시원한 보컬에 몸을 맡기고 외친다면 분명 카타르시스가 느껴질 것이다. 정 안 되면 시위의 의미로 큰 음량으로 틀어만 놓아도 좋을 것 같다.

이번에는 1년 전부터 필자가 깊게 빠져있는 곡으로 9와 숫자들의 ‘주부가요’라는 곡이다. 2019년 발매된 4집 ‘서울시 여러분’에 수록된 곡으로 지인들을 만날 때면 주부들을 위한 최고의 응원곡으로 강력하게 추천하고 있다. 제목의 ‘가요’는 조사(助詞)이자 ‘가요(歌謠)’로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주부 가요 대전 B조 준결승~’ 이라던지 ‘주부가요, 식기세척긴가요~’ 라는 식이다. 가사에 담긴 메시지는 간결하면서도 짜릿하다.
‘막둥이 어린이집 보내고 나면’ 찾아오는 네 시간 남짓 나만의 시간이 바로 ‘주부 가요 대전 B조 준결승’인데 상상 속의 나는 이미 ‘쌍문동 인순이도 잠실 주현미도’ 물리친 주부가왕이다. ‘주부라는 오명을 입고 내 자신을 잊고 살아온’ 나는 이제 내가 식기세척기냐고 진공청소기냐고 가족들에게 당당히 외친다. 그리곤 ‘남편은 물론이고, 자식들도 못 보는’ 나만의 천국으로 떠나는 것이다. 비록 주부도 엄마도 아니지만 노랫말에서 대리만족의 희열이 느껴진다. 어느 주부라도 한 번쯤은 남편과 자식에게 하고 싶은 말을 실컷 퍼붓는 상상을 해보지 않았을까.
고된 명절연휴가 끝나고 주부들이 모여 노래를 듣고 술을 마신다면 무슨 술이 좋을까? 비록 상상으로지만 몇 가지를 추려보았는데 알코올 도수가 낮은 순으로 추천해보고자 한다.

먼저 충주의 댄싱사이다컴퍼니의 ‘스윗마마’다. 사이다(혹 시드르)는 사과를 발효한 술로 댄싱사이다컴퍼니는 국산 사과나 다른 과실을 사용해서 여러 종의 사이다를 만들고 판매하는 곳이다. ‘스윗 마마’는 알코올 도수 5.5%의 사이다로 댄싱사이다의 대표 상품 중 하나인데 달콤새콤한 시드르의 풍미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으며 남녀노소 모두가 좋아할 만한 맛을 지닌 부담 없는 술이다. 안주도 따로 필요 없을 만큼 가볍고 달달하니 시원하게 한 잔 벌컥 벌컥 들이키면서 주거니 받거니 남편·자식욕을 하다보면 스트레스가 확 풀리지 않을까.
두 번째는 전남 남원 술소리의 ‘황진이’와 전북 장수의 알에프 와이너리의 ‘장수 오미자주’다.

‘황진이’는 알코올 도수 12%의 살균약주로 오미자와 산수유를 사용해 만든 술이다. 황진이라는 이름이 독특한데 대표님이 당시 KBS 드라마 ‘황진이’를 감명 깊게 보셔서라는 이야기가 풍문으로 전해진다. 아무튼 ‘황진이’는 가격도 착한데다 오미자의 달콤새콤한 맛과 산수유 구기자 등의 무거우면서도 씁쓰레한 단맛이 어우러진 맛난 술이다. 비슷하면서도 조금 더 오미자의 향과 맛에 집중한 술이 ‘장수 오미자주’로 알코올 도수 16.5도로 시중의 희석식 소주와 비슷하나 맛은 비할 바가 아니다. 알콜향을 지울 수는 없으나 오미자의 향과 다섯 가지 맛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누구나 맛있다고 인정할 만 한 술로 탄생했다.
세 번째는 주당 주부님들을 위한 술이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술로, 술아원의 ‘경성 과하주’다. 과하주는 여름을 나는 술이라는 이름답게 선조들의 지혜로 빚어진 술로 서양의 포트와인과 만드는 방식이 유사하다. 더운 여름 발효 초기에 당화를 잔뜩 이끌어 내고 증류주를 부어 잡균의 증식을 막는데 그 결과 알코올 발효가 멈추게 된다. 덕분에 20도라는 높은 도수임에도 발효주의 달달한 꽃내음과 쌀의 눅진한 단맛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뉴스를 보면 여성을 겨냥해 주류업계가 소주 도수를 낮춘다 어쩐다 하지만, 술 앞에 남녀가 어디 있을까. 20도의 과하주는 분명 매력적인 술로 천국으로 이끌어 줄 술에 적합하다. 혹여 무슨 안주가 어울릴까 걱정된다면 디저트주로도 그만이니 가볍게 준비해도 무방할 듯하다.

마지막으로는 봇뜰 양조장의 ‘백수환동주’를 권하고 싶다. 사실 ‘백수환동주’는 내가 생각하지 못한 술인데 가양주연구소 동기이자 실제 주부님(?)이기도 하신 S님의 글에 영감을 얻었다. ‘백수환동주’는 알코올 도수 12%의 탁주로 그냥 막걸리를 상상하고 마신다면 큰 코 다칠지도 모른다.
일단 걸쭉하다 느껴질 정도의 진함과 산미, 특유의 누룩 향과 견과류 및 묵은 과일향 등이 전통주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살짝 마시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백발노인이 아이가 된다는 회춘의 스토리가 일단 매력적이지 않은가. 그리고 원래 감미보다는 산미가 중독되면 무서운 법, 단맛으로 위로되지 않는 아찔함을 느끼고 싶다면 역시 무조건 추천한다.
이 땅의 모든 주부님들을 위한 글이지만 아직 가장 가까운 주부가 나의 어머니밖에 없는 지라 어머님을 상상하며 글을 쓰게 됐다. 이번 추석에 물론 내가 도와드린다고 도와드렸지만 거의 90퍼센트에 가까운 주방 일을 혼자 수고해주신 우리 엄마, 아들과 다르게 술은 단 한모금도 못 드시지만 그래도 아들이 빚은 오미자 와인은 맛있다고 반 잔 드신 우리 엄마다. 엄마가 다른 친구 분들이랑 술을 드신다면 이런 술들을 드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끝으로 우리 엄마 포함 내가 아는 모든 주부님들 모두 RESPECT!

◇ 필자 문경훈
▴1990년 출생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졸업▴한국전통주연구소 가양주반 수료
▴한국가양주연구소 전통주소믈리에 자격 취득 ▴한국가양주연구소 명인반 수료▴(현) 지혜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