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로부터의 도피처로서의 술
박정근(문학박사, 윌더니스 문학 발행인, 소설가, 시인)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마을에 힘든 일이나 기쁜 일이 생기면 주민들이 함께 모여서 고통이나 기쁨을 기꺼이 나눈다. 이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바로 술이다. 술은 각자의 개별자적 의식을 무너뜨리고 통합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신기한 음식이다.
이권을 지키려고 자기만의 영역을 지키기에 급급하다가도 술을 거나하게 마시면 이웃 모두가 한 형제라고 느껴진다. 그렇다고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다. 막걸리 한말에 돼지 두어 근이면 되리라. 그리고 동네 사람들을 초대해서 거나하게 마시면 모두 한 형제처럼 가까워지는 것이다. 도연명은 “잡시<雜詩>”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落地爲兄弟, 이 땅에 태어나면 모두 형제인 것을
何必骨肉親. 어찌 반드시 혈육만 가깝다 하리
得歡當作樂, 축하할 일 생기면 마땅히 즐겨야 하리라
斗酒聚比鄰. 술 한말 가져와 이웃을 불러 모으네
盛年不重來, 풍성한 시절은 다시 오지 않고
一日難再晨. 새벽 또한 하루에 두 번 오지 않으리
이 시에서 술은 여유 있고 즐거운 생활을 구가할 수 있는 수단이 되고 있다. 화자는 이웃들과 즐거움을 나누고 싶어 한다. 술은 결코 시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이웃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려는 시인의 마음이 드러난다. 시의 화자가 쾌락을 타인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것은 시간의 유한성과 유일성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결국 화자의 쾌락추구는 삶에 대한 긍정적 수용에서 가능한 것이다.
도연명은 술을 도피적 도구로서 활용함으로써 힘든 현실과 공포를 극복하고자 한다.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그는 몸이 그림자에게 말을 거는 형식을 고안한다. 이런 형식은 매우 독특한 시적 화법이 아닐 수 없다. 화자는 몸이라는 물질적 존재로서 초인적 존재가 될 수 없다고 토로한다. 즉 유한적 존재인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필멸성을 깨닫는 화자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잊고자 한다. 그는 죽음을 망각하고 잠시나마 마음의 평화를 획득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술을 마음껏 마시라고 제안한다. 술이 가진 마취적 효과를 이용하여 죽음이 몰고 올 공포를 잊고 싶은 것이다.
我無騰化術, 내가 신선처럼 하늘로 올라갈 비법이 없어
必爾不復疑.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음을 의심하지 않노라
願君取吾言, 그대에게 바라노니 내 말을 수용하여
得酒莫苟辭. 술을 얻거들랑 결코 사양하지 마시게나.
하지만 도연명은 술의 부작용을 언급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죽을 운명을 타고 났고 현자이건 우매한 자이건 일단 죽으면 다시 태어날 수 없다. 이것은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실존적 인식이 아닐 수 없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인간에게 너무 혹독해서 잊고 싶어 술의 유혹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지나친 음주는 오히려 죽음을 앞당길 수 있다. 화자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져 있는 인간에 대해 연민의 시선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의 필연성에 대해 긍정 또는 부정의 시선을 던졌던 도연명은 결국 치유제로서 술을 노래한다. 죽음을 생각하면 엄청난 두려움에 평정심을 잃어버린다. 불안에 휩싸인 마음을 달랠 수 있는 방법은 술밖에 없다고 본다. 미래가 어찌 될 것인지는 시인이 걱정할 게 아니다. 시인은 매우 현실적인 결론에 이른다. 미래의 불확실성에 집착하기 보다는 현재의 쾌락을 마음껏 즐기기로 결심한다. 현재를 즐겁게 해주는 최고의 애인은 바로 한사발의 탁주이다. 도연명은 <己酉歲九月九日>(기유년 9월 9일)에서 현재의 삶을 적극적으로 즐기라고 제안한다.
從古皆有沒, 오래 전부터 모든 사람은 죽고 마나니
念之中心焦. 그 운명을 생각하면 마음이 초조해지네
何以稱我情, 어떻게 내 마음을 달랠 수 있을까
濁酒且自陶. 그저 스스로 탁주 한 사발을 즐길 뿐이네
千載非所知, 천년 후 일은 내가 알 바 아니고
聊以永今朝. 그저 오늘 아침이나 길이 즐길 뿐이리
결국 도연명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술을 즐기는 쾌락 주의자가 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요즘 술이 건강을 해치는 적으로 인식하는 부정적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건강한 술은 오히려 인간을 도와주는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도연명의 시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다만 술을 적절하게 즐길 수 있는 절제가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