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歷史다, 배다리술박물관 박관원 관장
그의 아들과 5代째 배다리술도가 운영
“잿더미서 시작…곧 日本에 배다리술 수출할 것”
2004년 7월 개관 때부터 입장료 무료
“박물관서 시음하곤 미안해서 한두 병씩 사가지”
우리 나이로 올해 83이니 우리술의 산증인이다. 배다리술박물관 박관원(朴寬遠) 관장 얘기다. 그래서 만날 욕심을 냈다. 박 관장의 입을 통해 듣는 그의 생(生)은 곧 대한민국의 술 역사와 궤를 같이 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청자(聽者)의 입장은 편했다. 간간이 묻고 가만히 받아 적기만 하면 됐으니까. 그렇게 3시간이 지났다. 박물관을 같이 둘러보는 동안에도 얘기는 그치지 않았다. 이상하게 듣고 또 들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그렇게 다 듣고 나서 자유로를 건널 즈음, 박관원 관장의 얘기는 한 편의 잘 짜인 영화 같다는 생각을 했다.
경기 고양=인터뷰․글 김응구 사진 강병구(코리아세상)
박관원 관장은 14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복막염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별 어려움 없이 의학의 힘을 빌릴 수 있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양조장 사업이 괜찮아 광산업에까지 손을 댄 아버지였지만, 돌아가시니 세상이 모두 빚쟁이로 변했다. 박 관장의 어머니가 양조장을 계속 이어 하기로 결정했지만, 그때부터 고생길이 시작됐다. 결국 악착같이 번 덕에 빚잔치 한 번 진하게 했다. 허나, 신은 여전히 박 관장의 집안을 외면했다.
살 만하니 6․25가 터졌다. 그래도 피난은 가지 않았다. 그러다 1․4 후퇴 때는 지금의 통영까지 내려갔다. 당시 미군은 이곳저곳서 철수하며 그들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많은 건물들을 전소(全燒)했다. 능곡의 배다리술도가도 그중 하나였다. 머잖아 휴전이 됐고, 다시 고향으로 올라왔지만 이미 양조장은 잿더미가 되고 난 후였다.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때부터 하늘이 도우는 지 살 집과 움막이 얻어지더니, 그곳서 집과 회사를 오가며 틈틈이 양조장을 만들어 나갔다. 고향에서 가업(家業)을 계속 이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배다리술도가는 1915년 경기 고양시 주교리 56번지에서 시작했다. 창업자는 박승언 옹. 지금은 박관원 관장의 아들인 박상빈 씨가 술도가를 맡고 있다. 놀랍게도 5대째 양조장을 잇고 있다. 우리에겐 결코 흔치 않은 일이라 새롭고 반갑지만 때로 고맙기까지 하다. 정식 양조면허를 받은 건 1926년의 일이다.
배다리술도가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박정희 전(前) 대통령이다. 막걸리를 좋아했던 박 전 대통령이 즐겨 마신 술 가운데 하나가 배다리막걸리다. 그런 까닭에 한 해도 거르지 않고 14년 동안 청와대에 배다리막걸리를 날랐다.
“박 대통령은 가끔 비서실장과 함께 새벽에 청와대에서 나와 술 한 잔 하곤 했다지. 그런 박 대통령이 한양컨트리클럽에서 골프를 치고 나선 말을 타고 근처 삼송리의 ‘실비옥’이라는 가게에 들르곤 했는데, 배다리막걸리와의 인연은 그때 시작됐지. 청와대에 우리 막걸리가 들어가게 된 것도 사연이 많아. 당시에는 막걸리의 원료로 밀이나 강냉이를 사용했지 쌀은 금지됐었어. 그런데 내가 우겼지. 쌀로 만들어야 한다고. 그래서 청와대에 납품하는 막걸리는 쌀을 원료로 했지. 한 번은 정보과 사람이 우리 공장으로 왔는데, 아 글쎄 우리더러 위생복을 갖춰 입으라는 거야. 위생 개념이 전혀 없던 시절이라 갑자기 그걸 어디서 구해. 아무래도 대통령의 입에 들어가는 거라 그랬던 것 같아. 혹 문제가 있는 막걸리라 해도 대통령은 절대 죽지 않아. 그러기까지 여러 명이 먼저 맛을 보거든.(웃음) 결국에는 종로의 한 약국에서 약사 가운을 빌려, 그들이 올 때 종업원들에게 입히곤 했지. 아, 그때 입었던 가운은 박물관에서도 볼 수 있어.”
청와대에서 막걸리 값으로 얼마를 줬는지 궁금했다. 헌데 한 푼도 주지 않았다고 했다. 쉽게 이해가지 않아 다시 물었다. “아니, 그럼 뭐하러 막걸리를 줍니까?”
“그거 뭐 한두 말 정도 가져가는 게 다인데 무슨 돈을 받고 그래. 대신 유명세를 톡톡히 봤지. 대통령이 좋아하는 막걸리네, 청와대에 납품되는 술이네, 하는 식으로 소문이 나니까 꽤 멀리서도 오곤 했어. 그때 꽤 많이 팔았지. 잘 팔릴 때는 하루 평균 500말에서 600말 정도는 거뜬했어. 드럼통으로 치면 50~60통이야.”
2004년, 박관원 관장은 일본의 삿포로 맥주공장을 방문한 적이 있다. 100년도 더 된 전시물을 보곤 “한 번 해봐야겠다”고 맘먹었다. 술도가를 이어오며 소장하고 있던 술 도구와 각종 유물들을 하나둘씩 모으기 시작했다. 누룩 빻는 기계는 저 멀리 영양탁주장까지 찾아가 사왔다. 한 번은 경기 파주 보광사(普光寺) 근처에 있던 쌀 빻는 기계를 발견하곤 장정 6명이 산에서 들고 내려왔을 정도로 술박물관 건립에 공을 들였다.
술박물관 건축과 인테리어는 관련 전공자인 박상빈 사장이 도맡았다. 처음 생각과 달리 비용이 만만찮게 들어갔다. 수억은 들었겠다고 하니 “아직 빚이 많아, 갚고 있는 중이지”라고 했다.
배다리술박물관은 2004년 7월 개관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입장료는 무료다. 관람객들은 고마우면서도 미안하다.
“솔직히 우리 술을 알리려는 목적도 없진 않지. 실제로 박물관 1층 시음장에 들른 관람객들이 무료 시음까지 하고 나선 미안한 마음에 사가는 경우가 많아.”
박물관엔 일본사람들도 간혹 눈에 띈다. 그들이 배다리막걸리를 시음하면 대개 “이런 막걸리 맛도 있네” 하며 반가워한다. 강남 같이 술값이 비싼 곳에서도 일본인들의 배다리막걸리 사랑은 넘친다. 그런 반응에 힘입어 배다리술도가의 술은 곧 일본으로 진출한다. 얼마 전 일본의 한 도매업체와 수출계약을 맺었다. 그러기까지 1년의 시간이 걸렸다.
배다리술도가는 올해(2014년)로 꼭 100년을 맞는다. 이에 기념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그에 맞춰 ‘배다리술도가 100년사’도 펴낼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