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台祐의 취중진담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 고풍스런 권주사
알코올을 수사학적 표현을 빌린다면 ‘불타는 물(burning water/火水)’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불은 뜨거운 감성을, 물은 냉철한 이성을 나타낸다. 음주는 누구에게는 기억을 선명하게 하기 위해서, 또 누군가는 망각하기 위해 마신다. 그렇기에 ‘이성과 기억’, ‘감성과 망각’은 한 쌍을 이룬다. 여기에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인 비노 베리타스(In vino veritas/와인 속에 진리가 있다)의 정신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음주시에 고풍적인 권주사는 술자리를 우아하게 만든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현재를 즐겨라), 아모르 파티(Amor Fati/Saying yes to your life/운명을 사랑하라) 그리고 메멘토 모리(Memeto Mori/죽음을 기억하라)처럼 인생살이에서 금과옥조(金科玉條)가 된 명언도 드물 것이다. 이들 명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시 바스 비탐, 파라 모르템(Si vis vitam, para mortem)’, 즉 ‘생사일여(生死一如)’이자 ‘생사불이(生死不二)’와 같은 뜻일 게다. 그렇다면 이들 명언으로 음주시에 권주사로 사용한다면 가장 풍류와 우아, 그리고 품격있는 인 비노 베리타스가 된다. 이들의 전거를 살펴보자.
고대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Quintus Horatius Flaccus, 65〜8 BC.)는 왕인을 한 잔하면서 이런 시구를 남겼다. “카르페 디엠, 미니멈 크레듈라 포스테로(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 즉 ‘지금 이때를 잡도록 하게나, 미래에 대한 믿음은 되도록 줄이도록 하고’라는 지혜로운 송시를 읊으면서 “현명하게 살게나, 너의 와인을 마시게, 짧은 인생, 먼 미래에 대한 기대는 줄이게(Sapias, vina liques et spatio brevi spem longam reseces)”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탄복 뒤 불현듯 스치는 예감, 대부분의 인생들은, 시인의 의도와 정반대로, 내일은 알 수 없으니, 부어라 마셔라 인생을 낭비하는 데로만 달려가지는 않을까 하는 의심이 강하게 남는다. 1989년 공개된 미국의 드라마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에서 키팅 선생(John Keating/로빈 윌리암스 분)이 한 말로 더욱 유명세를 탔는데 ‘현재를 붙잡아라(Seize the day)’이다. 이를 빗댄 신조어로 ‘욜로(YOLO/You Only Live Once)’가 있는데 ‘한 번뿐인 인생에서 기회를 놓치지 말고, 현재를 즐기며 살아야 한다’는 의미와 상통한다.
한편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로 로마 제정시대에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행진을 벌릴 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이 말을 큰 소리로 외치게 했다는 데서부터 기원한다.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가장 낮은 신분인 노예의 입을 통해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에게 겸손함을 일깨워 주는 말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마라.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는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의미다. 또한, 로마에서는 귀족들 간의 인사말로도 사용되기도 했는데, 죽음을 생각하며 삶의 의미를 깨닫고 시간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라는 의미의 풍습이었다. 명정의 세계에 들고 싶을 때 ‘메멘토 모리’는 삶의 의미를 더욱 고양시키게 될 것이다.
카르페 디엠과 메멘토 모리를 합친 말, ‘카르페 비타(Carpe Vita)’가 있다. 카르페 디엠을 넘어서서 죽음 이후를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는 현재의 시간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부여잡는 지혜로운 삶, 이것이 바로 ‘카르페 비타’이다. 권주사로 이보다 철학적이고 고풍스러운 것을 없을 것이다.
‘아모르 파티’는 실존철학의 선구자 니체의 <즐거운 학문(Die fröhliche Wissenschaft)>에 나오는 철학적인 말이다. ‘사랑’을 뜻하는 아모르(Amor)와 ‘운명’을 뜻하는 파티(Fati)의 합성어로 ‘운명을 사랑하라(운명애/love of fate)’로 통상 번역된다.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적극적으로 개척하는 게 아모르 파티라고 했다. 그러면 삶은 그 순간부터 새로운 가능성과 창조의 바다로 열리게 될 것이라고 했다. 니체는 인간이 운명을 알고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위대하다고 보았다.
아모르 파티는 니체 철학 전반과 연관을 갖고 있는 개념으로, ‘디오니소스적 긍정(Das dionysische Jasagen)’의 최고 형식이라고도 불린다. 니체 철학의 핵심인 ‘영원회귀(ewig wiederkehren)’ 사상의 관점에서 보면, 삶은 동일한 것의 무한한 반복을 이루는데, 이를 통해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긍정해야 한다는 점에서 아모르 파티가 요구된다. 이 말은 가수 김연자가 불러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탄생한 두개골이 벽감(壁龕/niche)에 놓여있는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의 핵심 모토는 ‘메멘토 모리’다. 화가들은 왜 ‘죽음을 기억하라’고 종용했을까? 사실 ‘죽음을 기억하라’는 경구 뒤에는 ‘신이 주신 삶의 순간, 지금 현재를 맘껏 살고 즐기라’는 심오한 메시지가 포함돼 있다. 1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세이킬로스 석비(Epitaph of Seikilos)에서 발견된 악보에는 인생의 삶과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가사가 적혀 있다. “네가 살아 있는 동안, 빛나기를!/ 결코 괴롭거나 슬퍼하지 말기를!/ 인생은 찰나와도 같으며/ 시간은 끝을 청할 테니….” 이 노래에는 카르페 디엠과 메멘토 모리와 그리고 아모르 파티의 정신을 함축하고 있다. 즉 건전한 음주 의식에서 권배사로 인용되는 3개의 명언의 정신은 조선조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조선조 왕들 중에서 우아하고 품격높은 음주법으로 유명한 왕은 세종과 정조를 들 수 있다. 세종의 음주법은 ‘적중이지(適中而止)’로 ‘너무 지나치지 않고 적당히 그칠 줄 안다’라는 뜻이다. ‘적중이지’의 음주법으로 왕의 자리에 오른 왕이다. 반면에 정조는 할아버지 죽음을 불러오는 살벌한 금주법과 달리, ‘불취무귀(不醉無歸)’, 즉 ‘취하지 않은 사람은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주법으로 이전의 음주법과는 궤를 달리한다. 정조의 ‘불취무귀’는 사실 심각한 붕당 간 대립을 완화해 보려는 탕평책의 고육지책의 산물이었다. 그렇기에 음주는 취함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에 있는 것이다. 음주하는 방식은 세종과 정조의 주법은 상대성을 띤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술로 마음을 넓혀 사색당파를 타파하고 탕평책을 펼치고자 한 고심 끝에 나온 음주법으로 이는 카르페 디엠이자 메멘토 모리이고 아모르 파티이다. 음주의 진정한 의미는 ‘인비노 베리타스’에 있다. 권주사에서 선창으로 ‘불취무귀’ 하면 후창으로 ‘적중이지’라 하면 인비노 베리타스의 정체성 이루게 된다.
불타는 물의 명정세계는 취함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음수사원, 즉 인 비노 베리타스에 있다.
*지금까지 취중진담의 본란은 김원하 발행인이 혼자서 써왔습니다. 보다 다양한 이야기를 접하기 위해 몇 분이 취중진담에 동참 해 주시기로 했습니다. 이번호에는 남태우 교수님의 취중진담을 싣습니다. 남 교수는 본지에 ‘술의 신(酒神) 디오니소스(Dionysos) 신화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