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실존적 존재를 위한 음주가로서 도연명

자유와 실존적 존재를 위한 음주가로서 도연명

 

박정근(작가, 시인, 문학박사, 윌더니스 문학 발행인)

 

여러분들은 무엇을 위해 술을 마시는지 필자는 묻고 싶다. 어느 누구도 쉽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에 따라 음주의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에릭 프롬의 관점에서 보면 음주를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즉, 소유를 위한 음주와 실존을 위한 음주이다. 음주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쾌락이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마시는 것은 소유적 음주라고 분류할 수 있다. 반면에 특정한 목적 보다 정신적 자유나 자연적 무위를 즐기려고 술을 마시면 실존적 음주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방송의 술에 대한 광고를 보면 선남선녀를 내세워 시청자들의 말초신경을 자극시켜 사람들의 음주를 부추기는 전략을 사용한다. 매체들은 음주 욕망을 성적 욕망에 연계시켜서 시청자들을 조종하고자 한다.

시청자들은 스크린에 나타난 모델들이 즐겼을 욕망을 공유하고 싶어서 동일한 상표의 술을 찾는다. 이것은 자본주의 시대의 음주가 지향하는 통상적인 소유적 음주인 것이다. 사실 타인이 체험한 것을 모방하여 즐기려고 하는 음주에는 주체적이고 개별적인 실존이 부재하다. 이런 소유적 음주는 행복감의 최고봉에 다다를 수 없다.

그뿐만이 아니라 현대인들은 각양각색의 사회적 친목을 위한 음주를 즐기는 경우가 많다. 학연, 지연, 취미 등 같은 색깔의 인간들이 동질성을 확인하고 그룹의 소속감을 강화하기 위해 음주를 한다. 이런 음주 분위기 역시 개별성보다는 집단성을 더 상위 가치로 보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로운 사고나 행위를 제약하는 경우가 많다. 술을 마실 때 각자의 능동적 참여보다 그룹에 대한 소속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이런 음주는 스스로 행복감을 창조하지 못하고 타인의 반응에 의존해서 행복하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요즘 세상에 음주에서 도연명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어찌 기대할 수 있을까. 현대인은 거대한 욕망의 덩어리로 모든 것을 삼키기 위해 상어처럼 입을 크게 벌리거나 바짓가랑이 찢어질 정도로 경쟁하기에 바쁘다. 게다가 온갖 매체가 시민들의 욕망을 부추겨 상품의 소비자로 전락시키기에 혈안이 되어있다.

시민들의 눈 앞 사방에 총천연색의 매혹적인 성적 이미지가 날아다니며 출몰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그저 개별적 욕망을 충족시키기에 급급하다. 개인의 자유는커녕 욕망의 노예가 되어 끌려 다니는 형국이다. 그런 소유적 욕망을 향유하는 것이 마치 인간의 명성으로 인식하는 상황인 것이다. 도연명은 <음주(飮酒)>에서 이런 소유적 존재의 비극성을 한탄한다.

道喪向千載, 도가 죽은 지 천년이 되어가고

人人惜其情. 사람마다 각각의 정념만을 아끼네

有酒不肯飮, 술이 있어도 나서서 마시지 않고

但顧世間名. 그저 세간의 명성만 되돌아보네

그렇다면 실존적 음주는 어떤 것인가. 술을 마시는 목적이 무엇보다 자신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음주의 동기에서 개별적 능동성이 우선되어야 한다. 우리를 압박하고 있는 어떤 근심과 걱정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 대부분의 근심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물질이나 권력을 잃어버릴까 걱정할 때 발생한다. 사람이 물질과 권력보다 정신적 자유를 더 원한다면 근심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도연명은 소유적 존재로서 피할 수 없는 물질과 세속을 떠나기 위해 술을 마시고자 하였다. 술이 주는 도취감은 특정한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자아의식이나 모든 물질을 벗어나서 자유의 세계로 이끄는 것으로 보았다.

시인은 <연일 내리는 비에 혼자 술 마시며(連雨獨飮)>에서 술을 마시면 신선이 된다는 노인의 말을 듣고 보내준 술을 마신다. 그는 이웃의 말이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정서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동일한 효과를 체험한다. 모든 세계가 무의 경지로 들어가고 인위적인 경계가 사라지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놀라운 음주의 효과가 아닐 수 없다.

 

故老贈余酒, 오랜 친구 노인이 술을 보내며 말하기를

乃言飮得仙. 술을 마시면 신선이 되리라 하네

試酌百情遠, 한 잔 마신 술은 모든 감정을 잊게 하고

重觴忽忘天. 두 잔 마신 술은 문득 하늘마저 잊게 하네

天豈去此哉, 어찌 하늘이 이 세계를 사라지리만

任眞無所先. 진리에 맡기니 어느 것도 앞서는 게 없구나

 

일상에서 술을 마시는 일이 다반사이지만 그저 술을 습관처럼 마시는 알코올 중독에서 허덕이거나 남의 강요에 의해서 어거지로 마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것은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제시한 희극적 황홀경하고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도연명의 시에서 제시하는 실존적 음주를 새겨둘 필요가 있다. 음주가 행복의 즙이 되어야지 불행의 독약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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