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하의 취중진담
고향이 어디냐고 묻지 마세요
금년 추석도 그렇게 지났다. 많은 귀성․귀경 객들로 고속도로는 주차장으로 변했고, 열차며 항공편도 만석을 이뤘다. 코로나 때문에 고향을 찾는 것도 조심스러웠는데 올 추석은 마음 편히 다녀올 수 있었다. 고향(故鄕)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지만 이런 저런 사정 때문에 고향을 가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차가 밀려도 귀성객 틈에 껴 보고 싶어도 낄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는 귀성객들이 한 없이 부럽기만 했을 명절이다.
사전적 의미로 고향은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이 고향이다.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고향을 출생 장소, 출생등록지, 성장기 연고지, 부계 선대의 고향, 본적지로 보는 사람도 있다.
필자도 귀성객에 끼지 못하는 사람 중 하나다. 경기도 장단에서 태어나 1․4후퇴 때 피난 나와서 파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서울인구가 채 50만도 안 될 때부터 서울살이를 시작 했다. 나의 고향은 어디일까?
전추영 가수가 부른 서울탱고가 끌리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까.
내 나이 묻지 마세요/ 내 이름도 묻지 마세요/ 이리저리 나부끼며 살아온 인생입니다./ 고향도 묻지 마세요/ 아무것도 묻지 마세요/ 서울이란 낯선 곳에 살아가는 인생입니다.<중략> 술이나 한잔 하면서/ 세상살이 온갖 시름/ 모두 다 잊으시구려.
전국노래자랑의 명 사회자였던 송해 씨도 방송에서 그가 태어난 황해도 재령을 그렇게 그리워했지만 가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이처럼 6․25사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고 피난길에 올라 오늘 날까지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지낸다. 북녘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이 즐겨 찾는 임진각 망향단(望鄕壇)은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고향이다.
사회생활에서 타인과 쉽게 친해지는 길이 하나 있다.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 것이다.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도(道)나 시(市)만 같아도 친근감이 금방 생기는데 군(郡)이나 리(里)까지 같으면 이건 헤어졌던 친척이나 만나 것만큼 상봉의 기쁨이 배가 된다.
게다가 혹 초등학교나 중․고등 동문이라도 확인되는 순간 바로 형․동생이 되는 것이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품성이다.
그런데 고향이 어디냐고 함부로 물었다간 최대 500만원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 ‘채용절차법’ 때문이다. 이 법률이 일반인들을 상대로 한 것은 아니지만 신규 직원을 채용하는 인사담당자들은 조심해야 한다.
이 법률은 공공기관 뿐 아니라 민간 기업이 채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리를 막고 채용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2014년 도입한 일명 ‘블라인드 채용법’으로도 불린다. 이 법 개정안이 2019년 7월 17일 시행됐다. 법률에 따르면 채용 면접관이 채용과정(서류, 필기, 면접)에서 편견이 불합리한 차별을 야기할 수 있는 출신지를 묻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물론 사적으로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 것까지 처벌을 하지야 아니겠지만 “고향이 어디냐고 묻지를 마세요….”
작곡가 임종수 씨가 통학열차를 타고 중․고등학교를 다닌 황등역과 이리역 사이에 핀 코스모스를 생각하며 만든 ‘고향역’을 나훈아가 구성지게 불러 실향민들의 애창곡이 되었다.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역/ 이쁜이 꽃뿐이 모두 나와 반겨주겠지/ 달려라 고향열차 설레는 가슴안고/ 눈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역.
어떤 이들은 현대인은 마음의 고향을 잃은 채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연어처럼, 강약의 강도는 있지만 어느 정도 귀소 본능이 있다. 사회인이 된 이후에는 몇 십 년을 거주했어도 현재 살고 있는 지역을 고향으로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애향심을 매개로 타지에서 고향 사람들끼리 단합하는 향우회(鄕友會)조직이 잘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일게다.
일본도 이촌향도(離村向都)로 인해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사는 사람이 많은데, 현재 대도시에 살고 있어도 세금 일부를 고향에 기부하는 것으로 대체하고 그 대가로 세금 혜택이나 지역 특산물을 받는 ‘고향납세’ 제도가 2008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를 벤치마킹한 ‘고향사랑기부금’ 제도(고향세)가 2021년 9월 28일 국회를 통과했다. 2023년 1월 1일부터 시행한다.
납세자가 자신이 태어나 자란 고향이나 관계가 깊은 지역 또는 납세자가 개인적으로 응원하고 싶은 지역을 선택해 기부하고, 기부자에게는 그만큼 주민세, 소득세 등 세제 혜택이 주어지는 제도다. 정확히 말하면 세금은 아니지만 흔히 줄여서 ‘고향세’라고도 한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 기부자에게 해당 지역 특산품(답례품)을 개인 기부금액 총액의 30% 한도 내로 줄 수 있다. 이 경우, 상대적으로 수도권을 제외한 지방자치단체들이 세수 면에서 이전보다 혜택을 볼 확률이 높아진다.
미국의 소설가이면서 시인인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은 인생이란 고향집으로 향하는 여행이라고 했다. 그의 대표작《백경》에서 고래이야기를 다룬 것은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찾아갈 수 있는 고향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인생 여로다.
<삶과술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