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하의 취중진담
술 이기는 壯士는 없다
“천하에 인간이 하는 일이 많건만 술 마시는 일이 가장 어렵다. 그 다음에 어려운 일은 여색(女色)을 접하는 일이요, 그 다음이 벗을 사귀는 일이요, 그 다음이 학문을 하는 일이다. 주색우학(酒色友學) 이 네 가지는 군자(君子)가 힘써 수행(修行)해야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주역학자 초운(草雲) 김승호(金承鎬) 선생이 <옥영서(玉盈書)>를 펴 낼 때 출판사가 책 소개에서 밝힌 내용이다.
주당들에게 알려진 “물고기는 물과 싸우지 않고 주객은 술과 싸우지 않는다”는 것은 옥영서의 부제(副題)다.
차제에 책에서 밝힌 내용을 살펴보면 “술은 처음에는 하늘에 바치기 위해 있었던 것인데 후에 점점 인간의 정신이 발전하여 신에 버금가는 정신을 소유하게 되자 신들의 일상품인 술마저도 인간이 사용하게 된 것이다. 어린아이가 술을 마셔서는 안 되는 이유도 바로 아직 정신이 미숙하기 때문이거니와 어른이라도 정신상태가 허약하다거나 인격이 부족한 사람이 술을 마시면 탈을 일으킨다. 그래서 항간에서는 술을 마시면 사람이 버려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실은 술을 마셔서 정신에 지장이 오는 사람은 아직 정신이 성숙되지 못한 사람이거니와 인격수양이 덜된 사람인 것이다.”
또 “짐승이 술을 마시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이 정신이 허약하기 때문이다. 짐승은 정신이 너무 허약하여 술을 감당하지 못한다. 옛날에는 신들이 인간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가졌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인간은 문화적이고 정신적이기 때문에 술을 마셔도 신들이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술이 얼마나 좋았기에 자기네들(신들)끼리만 마셨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으로 술을 마셨던 기억은 잊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 심부름으로 막걸리를 받아오다가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마셔봤던 술맛, 한 모금이 두 모금되어 얼굴이 빨개졌던 추억, 뒷골목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소주잔을 털어 넣던 기억이 아련한 축억으로 남는다.
옛 어른들은 술은 부모한테서 배워야 한다며 제사 지낼 때 음복주를 마시도록 하기도 하고 어른들 술상에 심부름을 시키며 자연스럽게 술과 친하게 한다.
요즘 일부 학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이른 나이에 술과 친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주장을 펴는 사람들은 그들의 주장이고, 술을 이해하고 올바르게 마실 수 있다면 그 것 또한 좋은 것 아닌가.
술을 좋아했던 조지훈(趙芝薰)은 1956년 발표한 ‘주도유단(酒道有段)’글에서 “술을 마시면 누구나 다 기고만장하여 영웅호걸이 되고 위인 현사(偉人 賢士)도 안중에 없는 법”이라며 그 사람의 주정을 보고 그 사람의 인품과 직업은 물론 그 사람의 주력(酒歷)과 주력(酒力)을 당장 알아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주도에도 엄연히 단(段)이 있다며 음주 18단을 발표한바 있다. 18단은 1단 불주(不酒)에서 시작하여 18단 폐주(廢酒)까지 이른다.
폐주인 18단에 이르기 전 17단은 관주(觀酒)다. 관주는 술을 보고 즐거워하되 이미 마실 수 없는 사람이다.
젊어 한 때 술을 보면 들고 가지는 못하지만 마시고 갈수 있던 시절은 어느덧 가버리고 술을 봐도 마시지는 못하고 쳐다보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은 오로지 본인의 책임이다.
고려시대의 우탁(1262∼1342)이 지은 시조 탄로가(嘆老歌)에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은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고 하지 않았던가.
세상의 속도는 나이에 비해 현기증 나게 빨라진다. 흔히 “술 앞에 장사 없다”고 한다. 고인이 된 조 모 배우의 술 이야기는 전설처럼 전해 내려온다. 그는 두주불사형으로 연예계 최고 주당으로 통하던 배우였다. 혼자 양주 7병을 마시고도 모자라 맥주 30병을 입가심으로 마셨다는 전설의 주인공이다. “다음날 숙취도 없고 병원에서 스님 간처럼 깨끗하다고 했다”며 건강을 자랑하던 그는 어느 날 간암 판정을 받고 얼마 후 사망했다. 그의 나이 67세 였다.
술을 적(敵)으로 삼아 이기려고 하면 언젠가는 탈이 나기 마련이다. 큰 소리 뻥뻥치던 두주불사하던 천하장사도 가는 세월 잡지 못하고 병풍 뒤에서 술 석잔 받게 되는 패잔병 신세가 되기 마련이다. 술을 애인처럼 대하라. 아무리 험악한 풍성을 지닌 사람이라도 애인 앞에서 얌전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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