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 사람들이 술 마시는 법(2)

아미2리에 위치하고 있는 숭의전 지는 고려 태조를 비롯한 7왕의신위(神位)를 봉안하여 제사지내던 곳이다.조선시대에는 역대 왕조의시조를 모신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평양의 숭령전(崇靈殿)은 단군과고구려 시조 동명왕을 모셨고, 평양의 숭인전(崇仁殿)은 기자(箕子)를 모셨다. 경주의 숭덕전(崇德殿)은 신라의 시조를 모셨고,충청남도 직산의 숭렬전(崇烈殿)은 백제의 온조왕을 모셨으며,숭의전에는 고려 태조 및혜종·정종·광종·경종·목종·현종을 제사 지냈다.1399년(정종 1)에 창건된뒤,1452년(문종2)에숭의전이라고 이름 붙였으며,고려 왕족의 후손들이관리하도록 하였다.

 

임진강 사람들이 술 마시는 법(2)

 

박용수(연천양조 대표)

 

 

숭의전에 서린 애환

 

박용수

숭의전은 조선이 개창한 직후에 바로 조성되지는 않았다. 이성계는 고려 국왕으로 즉위하여 고려 왕조의 국호와 법제도를 계승한다고 표방하였고, 곧이어 새로운 이씨왕조를 개창하였다. 그래서 그는 건국이념이 되는 유교의 천명과 인륜이라는 이념으로 전조인 고려왕조에 대한 예우와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성계의『즉위교서』의 제1번으로 이것을 가장 먼저 거론하고 있다는 것은 물론 당시의 정치적 상황도 있었겠지만 조선의 건국 주체인 신진사대부의 유교적 이상 실현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어

진다.

 

왕씨(王氏)의 후손인 왕우(王瑀)에게 기내(畿內)의 마전군(麻田郡)을 주고, 귀의군(歸義君)으로 봉하여 왕씨(王氏)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그 나머지 자손들은 외방(外方)에서 편리한 데

태조의 즉위 교서 –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1392년) 7월 28일 정미 3번째 기사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

위 태조의『즉위교서』에 나오는 기내(畿內)는 당시의 서울인 개성의 주위를 경기라고 하였다는 점에서 지금의 경기도와 같은 의미로 이해하여도 무방하리라. 개성에서 멀지않은 마전군은 옛 마전 현이 있었던 지금의 연천군 미산면 마전리이며, 숭의전에서 가까운 바로 옆 마을이기도 하다. 이성계와 왕우는 이성계의 아들 이방번과 왕우의

딸이 결혼을 하여 사돈관계이었기도 하지만, 왕우와 개인적인 친분이 두텁고 이성계에게 협조적인 인물이었기에, 고려왕조의 제사를 그에게 맡겼다고 짐작해 볼 수 있다.

1899년에편찬된『마전군읍지』〈奎10725〉에수록된지도.원본의크기는 32cm×38.7cm이다. 북쪽을 위로 그렸고, 동서로 길게 배치한 회화식 지도이다. 고을이 산지에 둘러싸여 있는 형상으로 그려져 있다. 산과 하천 모두 푸른색으로 채색하였고, 도로는 붉은 선으로 표현하였다. 중앙에 읍치가 자리하고 있다. 관사(官舍), 객사(客舍), 향교(鄕校)가 그려져 있고, 그 주위로 사직(社稷), 성황(城隍), 여단(厲壇)이 보인다. 읍치 서쪽으로는 고려왕들을 제사지내던 사당인 숭의전(崇義殿)이 있다. 관할 동리들의 이름과 위치를 꼼꼼히 표기하고 민가들을 그려놓은 점이 특징적이다.

이성계의 교지에 따라 왕우는 마전군 내 답동리(沓洞里)에 위치한 앙암사(仰庵寺)라는 사찰에서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개성의 고려 종묘에서 고려태조 왕건의 동상을 앙암사로 옮겨 태조묘를 만들고 태조 왕건의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성계는 유교의 원리에 따라 패망한 왕조의 제사를 끊지 않는다는 명분 아래, 제사는 혈사(血嗣)의 원리에 따라 고려왕조의 후손이 제사를 지내도록 예우를 하였다. 이렇게 하여 조선은 과거 왕조에 대한 예우를 통해 새로운 왕조의 정통성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자 한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그 이후 조선은 단군전, 기자전 등 사전(祀典)을 정비하면서 고려태조묘에 백성들에 대한 공이 있다는 이유로 혜왕, 현왕, 충경왕, 충렬왕의 제사를 편입하여 유교 관례대로 제후 5묘의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또한 이성계의 지시로 성종, 문종, 공민왕의 3왕을 추가하여 8왕의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으나, 태조 6년에 왕우가 사망하고 왕우의 관작을 계승해야 할 두 아들은 왕자의 난에 연루되어 사망하게 된다. 왕우의 집안은 친 이성계파라는 점에서 숙청을 당해 큰 화를 입고 태조 묘에 대한 제사의 주체 마저 대가 끊기게 된다.

그렇지만 조선왕조의 입장에서는 고려 태조 묘에 대한 제사를 폐지할 수 없었기에, 정종은 즉위 후 바로 마전현에 사당을 세우고 왕우가 지냈던 제사를 나라에서 직접 관리하게 하였다.

태종은 조선의 종묘가 5묘제인 점을 들어 고려의 종묘를 3위 봉사로 줄였고, 다시 8위 봉사했다가, 세종 때는 지금의 태조, 현종, 문종, 원종의 4위 봉사로 변경하였다. 그리고 문종 때에 숭의전을 설치하면서 고려조의 충신 정몽주를 포함한 16공신을 함께 모시도록 하고 후손이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유교 이념에 따라, 왕 씨 후손에게 제사를 맡기고자 충청도 공주에 사는 왕우지를 찾아내 성씨를 임씨로 변경하고, 숭의전 부사 관품과 월봉을 주고 대대로 제사를 맡게 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제사의 주체는 중앙에서 관료를 파견하였고, 왕 씨 후손을 예우차원에서 명예직으로 대우하였지만 실제 권한을 주지는 않았다고 한다.

숭의전 희준(犧尊). 희준은 제례 때에 쓰는 술 항아리의 하나. 목제(木製)이며 짐승의 모양으로 만들었다.

선조 때에는 조일전쟁(임진왜란)으로 인해 숭의전이 파괴되어 제사를 지내지 못하기도 하였고, 전쟁이 끝나고 복원되었으나 그 이후로는 위상이 점차로 격하되었다. 더욱이 고종 때에는 숭의전에 대한 특별 우대를 철폐하고 숭의전 관료제도 마저도 폐지하였다. 그러나 격하된 위치에서도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에서 제사를 봉행하였다.

 

한국전쟁 때에는 영국군에 의해 숭의전 전각이 멸실이 되었으며, 영국 연방인 캐나다군이 주둔하여 수송부와 여단장 숙소로 사용하면서 중장비를 동원하여 숭의전 터를 평지로 변형하여 군 주둔지를 만들면서 완전히 훼손되어 파괴되고 말았다. 정전 후 수복되었던 숭의전 터에서 개성 왕 씨 종친회에서 장막을 치고 위패만 모시고 제례를 봉행하여 오다가, 1971년에 대한민국 사적 제223호로 지정되면서, 1973년에 왕 씨 후손이 정전을 복구하고 그 이후에 배신청, 이안청, 삼문 등 차례로 복구를 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필자 : 박 용 수

▴(현)연천양조 대표이사▴(현)백학아이티 대표▴숭의전고려종묘제주제조자 지정(2021)▴전통주 주예사(2017)▴막걸리학교 수료(2015)▴넷크루즈 전무(소프트웨어 개발)▴S/W특급기술자▴CISA(국제정보시스템감사)▴동국대학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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