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영감들의 수다

김원하의 취중진담

 

풋영감들의 수다

 

거의 모든 단어가 검색되는 네이버 백과사전에서도 검색이 잘 안 되는 단어가 있다. ‘풋영감’이란 단어다. 겨우 찾아낸 것이 동아일보에서 (2003.05.14.)에 실린 ‘이시형 열린 마음 열린세상’에서「시든 카네이션」이란 제하의 칼럼에서 이시형 박사는 “요즈음 우리 연배의 풋영감들이 모이면 이런 타령이 단연 화두다. 며느리가 괘씸하다는 불평도 더러는 있다. “어떻게 키웠는데, 자기가 딱 차지하고선…. 그게 누구 돈인데?” 이런 내용에서 ‘풋영감’이란 단어가 검색된다.

 

이시영 박사는 다른 칼럼에서 퇴직하고 모인 친구들과 대화에서 “나이 들었으니 영감(令監) 소리를 듣긴 들어야 하는데 영감소리를 듣기엔 어딘가 젊고 팔팔하지 않느냐”며 “밤(栗)이나 곡식이 영글기 전에는 ‘풋’자를 붙여서 ‘풋밤’이니 ‘풋고추’하는 것처럼 우리도 아직 완전한 영감이 되지 않았으니 ‘풋영감’이라고 하자”는 중론을 모아 친구끼리 ‘풋영감’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술회 한 적이 있다. 언젠가는 ‘풋영감’이 사전에 등재할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정신과의사가 지어낸 말이니 일견 수긍도 가고 필자 역시 ‘풋술’이니 ‘풋고추’니 하는 말을 좋아한다. ‘풋’이란 말에는 싱싱함과 풋풋함이 짙게 배어 있어 정감이 가는 단어다.

나이 들어도 마음만은 시퍼렇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치 포인세티아(Poinsettia)처럼 말이다. 크리스마스 꽃으로 알려진 포인세티아는 붉은 꽃잎은 열정적인 반면 아랫부분은 시퍼렇다.

식물에 대한 식견이 부족한 탓으로 포인세티아에 대한 언급은 자제하지만 그 생김생김이 풋영감과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창 젊은 날 친구들 모임에선 미래 지향적이거나 이성(異性)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쓰잘데기없는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시간을 보냈던 젊은 날은 이제 다시는 오지 않겠지만 그 때가 그립다.

지공선사(地空禪師)가 되었어도 마음속으론 ‘젊은 오빠’ 소리를 듣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오빠소리는커녕 어디를 가나 어르신 소리를 듣고 사는 풋영감들. 할아버지 소리 듣지 않는 것만이라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것일까.

우리나라에서 노인을 구분하는 생활연령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노인복지법에 65세 이상을 경로우대 대상자로 정하고 있다. 이 기준은 유엔이 1956년 65세부터 노인이라고 지칭한 이래 특정 국가의 노령화를 가늠하는 척도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65세라는 노인의 나이는 고정된 나이가 아니다. 유엔은 2015년 새로운 연령 구분 기준을 제시하고, 체질과 평균수명 등을 고려해서 생애주기를 5단계로 나누었다. ▷0~17세 미성년자 ▷18~65세 청년 ▷66~79세 중년 ▷80~99세 노년 ▷100세 이상 장수 노인 등으로 나눠 평생연령 기준을 재정립했다. 이 기준에 의하면 79세 이전까지는 중년이고, 80세부터가 노인인 셈이다.

유엔이 정한 기준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지 않다. 이 기준대로라면 풋영감들은 대부분 중년에 해당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노인 소리를 듣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여기며 살면 된다.

사무엘 울만은 ‘청춘’이라는 시에서 “청춘은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니고 마음의 상태로서, 사람은 나이 때문에 늙지 않고, 이상을 버림으로써 늙는다”고 했다.

100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도 “사람은 성장하는 동안 늙지 않고, 인생의 황금기는 65세에서 75세”라 했다.

김 교수의 표현대로라면 ‘풋영감’이야말로 인생의 황금기가 아닌가. 모처럼 만난 모임에서 궁상맞은 이야기 집어치우고 활기차고 힘찬 수다를 떨어봄이 어떠하실지.

붓다 이전의 싯다르타 왕자가 궁궐 밖 노인을 보고 자신에게 탄식한다. “오! 지금 이미 내 안에 미래의 노인이 살고 있도다.”

나이 들었다고 지나치게 어른 행세하지 말고 젊은이들과 친구처럼 지내는 일을 일상화 하라. 그럼 마음이 젊어지고 몸도 건강해진다. 보약이 따로 없다.

수명이 점점 길어져 ‘고령 국가’에 진입하고 있다. 고령화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정책이 필요할까. 노인에게 돈과 건강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젊은 층과 세대 갈등, 외로움과 고독, 가족·사회와 분리되는 소외 등을 들여다보아야 할 시점이다.

풋영감들이 모이면 떠들어 대는 수다 역시 이런 공통점이겠지만 누가 나서서 풋영감들의 수다를 대변해 주지도 못하는 세대가 되어 가고 있다. 풋영감들이여! 라떼만 찾지 말고, 모든 것 내려놓고, MZ세대 속으로 빠져 보자. 그게 젊어지는 비결이라잖는가.

삶과술 발행인 ti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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