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말들이 술잔으로 돌려마시던 아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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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말들이 술잔으로 돌려마시던 아란배

 

공총자(孔叢子) 유복(儒服)에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속담에 요(堯)와 순(舜)은 큰 술잔으로 천 잔의 술을 마시고, 공자는 백 잔을 마셨는데, 자로는 헉헉거리면서도 오히려 한 잔 밖에 마시지 못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인격이 훌륭한 사람일수록 술을 잘 마시는 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조선 초기에도 그런 믿음이 팽배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조선 초기 정계에는 유명한 주당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륙(李陸)의 청파극담(靑坡劇談)을 보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을 꼽고 있다.

정인지는 항상 “술은 노인에게는 어린아이의 젖과 같다.”고 하면서, 곡식으로 만들었으니 몸에 이롭다고 하고는 “내 평생 밥을 잘 못 먹으니 술 아니면 어떻게 지탱하나”하는 것이었다. 서거정, 이파, 손순효 등도 모두 술로 밥을 대신했다.

조선시대 서거정이 저술한《필원잡기(筆苑雜記)》에 의하면 일본 사신이 왔다가 돌아가면서 세 가지 장관을 꼽을 것 중 하나가 “사신을 대접하는 관인이 큰 잔으로 대작하면서 술 한 섬을 마신 것”이라 했다. 일본 사신을 접대한 이가 바로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이숙문이었다고 한다.

이숙문이 마신 한 섬의 술은 도대체 얼마만큼의 양이기에 일본 사신의 눈이 휘둥그레졌을까? 조선시대의 도량형을 기준으로 오늘 날 수치로 환산하면 1.5ℓ짜리 음료수 병으로 약 50병이 넘는 수치다.

 

예나 지금이나 주당들은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이 많았고, 술잔을 가지고 잔 머리를 많이 썼던 모양이다. 옛날 임금께서 오성이 하도 술을 마시니 술잔 하나를 내리시고 “하루에 이걸로 한 잔 이상 먹어서는 안 된다”고 어명을 내리셨다. 그런데도 오성은 다음날 술이 취했다. 화가 난 왕은 “한 잔만 먹었는데 어찌 술이 취했는가”라고 꾸짖자 오성은 “임금이 주신 술잔을 두들겨 펴서 아주 큰 잔을 만들어 한 잔 마셨더니 취했노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왕도 껄껄 웃고 말았다는 이야기는 술에 얽힌 해학의 한 대목이다.

성종 때 정승 손순효도 같은 꾀를 낸 사람이었다. 손순효는 인재 등용에서 뛰어나 성종의 친애를 한 몸에 받는 신하였으나 가장 큰 약점이 있었으니 술을 너무 좋아했던 것.

어느 날 성종이 명나라에 국서를 보낼 일이 있어 다급히 손순효를 찾았는데, 만취한 상태로 나타난 그를 보고 성종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렇지만 순식간에 명문을 지어내는 손순효를 보고 그만 화가 누그러진 성종. 대신 술에 대한 경고로 작은 은잔 하나를 그에게 하사하며, 이제 이 잔으로 술은 하루 석 잔만 마시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술을 너무도 사랑했던 손순효에게는 참으로 지키기 힘든 어명이었을 게다. 궁리 끝에 손순효는 세공 장인을 불러 은잔을 두들겨 펴서 사발 만하게 만들어 하루 석 잔씩 마셨다고 하니, 후에도 늘 대취상태. 작은 은잔에 하루 석 잔 마시는 사람이 늘 취한 상태라니. 결국 성종이 이를 보고 자초지정을 묻는다. 그런데 손순효의 답이 절묘하다. “술이 너무 좋긴 하고, 성은은 어길 수가 없어 은잔의 무게는 조금도 다름없이 잔을 펴 하루 석 잔만 마셨습니다.” 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성종은 무척이나 너그러운 심성의 소유자였던지, 아니면 손순효를 워낙 아꼈던지, 그만 두 손을 들고 말았다고 한다.

술잔이란 단순히 술을 따라 마시는 잔이라는 기능적인 해석에 불과하지만 시공간에 따라 술잔의 의미는 실로 다양하다. 술잔을 놓고 인류가 처음으로 마음 놓고 빚어 놓은 예술품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주당들 입장에서는 지당한 말씀. 지금도 선사시대의 주거지에서 어쩌다가 깨진 술잔 하나라도 나오면 술을 마시지 않고도 매우 흥분하는 것은 술잔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이다.

조선시대 공무원도 술을 몹시 좋아했던 모양이다. 관청마다 술잔을 만들어 놓고 술을 마셨다고 하는데 사간원의 아란배(鵝卵杯)는 한잔에 수정 구슬이 백 개나 들어갈 정도로 컸다고 하니 아마 한 말은 되는 술잔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대폿잔을 만들어 놓고 일정한 날을 잡아 상하차별 없이 술을 돌려가며 마심으로써 일심동체를 다지는 의식이 보편화 되었다고 한다.

사간원의 아란배, 교서관(校書館)의 홍도배(紅桃杯), 예문관(藝文館)의 장미배(薔薇杯) 그 대표적인 술잔들이었다.

지봉유설(芝峰類設)에는 소주는 약으로 쓰였기 때문에 많이 마시지 않고 작은 잔에 마셨고, 그래서 작은 잔을 소주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술잔은 재료, 크기, 모양, 무늬, 용도, 음주습관, 주체 그리고 술이 든 상태 등 8가지로 분류하고 있다.(남태우 교수의 ‘홀 수배 음주법의 의식과 허식’ 참조)

지금도 사용하는 명칭이 있지만 대부분은 문헌상에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주당들이라면 한번쯤 알아두는 것도 유식한(?) 주당이 되지 않을까.

 

■ 재료와 관련된 술잔의 명칭

 

촉루배(髑髏杯):해골로 만든 술잔. ‘겁파라(劫波羅)’라고 음사되기도 함.

각배(角杯):짐승의 뿔로 만든 술잔으로 일명 뿔잔이라고도 한다.

나배(螺杯):소라 껍데기로 만든 술잔.

금배(金杯):금으로 만들거나 꾸민 잔. 금잔(金盞)이라고도 한다.

납배(拉杯):도자기를 만들 때 손 물레로 그릇 몸을 만들어 본떠서 만드는 잔.

백옥배(白玉杯):흰 빛이 나는 옥으로 만든 잔.

벽옥배(碧玉杯):푸른빛이 나는 옥으로 만든 술잔.

야광배(夜光杯):야광주로 만든 술잔.

파리배(玻璃杯):수정으로 만든 술잔.

사기잔(沙器盞):사기로 만든 술잔.

와치(瓦巵):잿물을 덮지 않은 질그릇 잔.

목배(木杯):나무로 만든 잔 나무잔.

쌍도배(雙桃杯):한 쌍의 복숭아를 붙인 듯 한 모양의 술잔.

은굉(銀觥):은으로 만든 술잔으로 은배(銀杯) 또는 은잔으로도 호칭한다.

경배(瓊杯):옥으로 만든 술잔인데 옥배(玉杯), 옥상(玉觴), 옥잔(玉盞), 옥치(玉巵)라고도 한다. 이 술잔은 이백의 시에 나타나기도 한다.

 

객중행(客中行) 이백(李白)

 

蘭陵美酒鬱金香/ 난릉의 고운 술 울금향으로 빚어내어

玉碗盛來琥珀光/ 옥 술잔에 가득 담아오니 호박 빛깔이네

但使主人能醉客/ 다만 주인께서 나그네 취할 수 있게만 해주시면

不知何處是他鄕/ 어느 곳이 타향인지는 알 수 없겠구려

 

■ 크기와 관련된 술잔의 명칭

 

거굉(巨觥):뿔로 제조한 크기가 큰 술잔으로 거배(巨杯), 대배(大杯), 대백(大白), 대잔(大盞), 대포(大砲), 대폿잔 등으로 불린다. 觥은 뿔잔 굉이다.

 

 

■ 모양과 관련된 술잔 명칭

 

별잔(鼈盞): 자라의 입모양처럼 만든 술잔.

앵무배(鸚鵡杯):앵무새의 부리 모양처럼 생긴 조개껍질로 만든 술잔.

부준(鳧樽):질흙으로 만든 물오리 모양으로 만든 술잔.

파배(杷杯):손잡이가 달린 술잔.

오채파배(五彩杷杯):거죽에 오채로 그림을 그린 손잡이가 달린 술잔.

팔각파배(八角杷杯):여덟모가 지고 손잡이가 달린 술잔.

반잔(盤盞):받침이 있는 술잔.

고배(高杯):굽다리 접시 모양이 목제 제기처럼 생겼기 때문에 한자로는 고배로 불리며, 뚜껑의 유무에 따라 유개고배와 무개고배로 나누어 부른다.

안배(眼杯):발생의 초기에 뇌포의 양쪽이 돌출하여 술잔처럼 된 것. 발생이 진행됨에 따라 망막이 됨.

 

■ 무늬와 관련된 술잔의 명칭

 

토호잔(兎毫盞):토끼털과 같은 무늬가 있는 술잔.

반규가(蟠虯斝):용무늬를 넣어 만든 술잔.

대피잔(玳皮盞):거북이 모양을 넣어 만든 술잔.

 

■ 용도에 관련된 술잔의 명칭

 

제주잔(祭酒盞):제주를 담은 술잔.

퇴주잔(退酒盞):제사를 지낼 때 퇴주한 술잔.

축배(祝杯):축하하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 마시는 술잔.

상잔(賞盞):상으로 주는 술잔.

이별배(離別杯):이별할 때 마시는 술잔.

벌배(罰杯):술자리에서 술 마시는 규칙을 위반한 사람에게 벌로 마시게 하는 술잔.

계영배(桂盈杯):술을 많이 마시는 것을 경계하기 위하여 특별히 만든 술잔인데 일명 절주배(節酒杯)라고도 한다.

소주잔(燒酒盞):소주 따위 독한 술을 마시는데 쓰는 술잔.

성배(聖杯):①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 쓴잔. ② 성찬식 때 쓰는 잔.

 

■ 음주습관과 관련된 술잔의 명칭

 

순배(巡杯):차례대로 돌아가며 마시는 술잔인데 돌림잔, 주순(酒巡), 행배(行杯)라고도 한다.

종배(終杯):술잔을 차례로 돌리며 술을 마실 때의 맨 나중의 술잔인데 필배(畢杯)라고도 한다. 말배(末杯), 납배(納拜)로 호칭되기도 한다.

유배(流配):술잔을 물에 띄워 보내는 술잔.

폭배(暴杯):술잔을 돌리지 않고 한 사람에게만 거듭 따르는 술잔.

주불쌍배(酒不雙杯):술을 마실 때 잔의 수효가 짝수로 마심을 싫어하는 잔.

건배(乾杯):건강, 행복 따위를 빌기 위하여 서로 술잔을 길이 들어 마시는 잔.

뇌상(酹觴):술을 땅에 따를 때의 술잔. 강신(降神)을 빌기 위하여 술을 땅에 부을 때 쓰는 잔. 뇌주(酹酒)는 술을 땅에 부어 강신을 비는 일.

계배(計杯):술집에서 술의 순배나 또는 잔의 수효를 세어 값을 계산함.

후래삼배(後來三杯):술자리에서 늦게 온 사람에게 먼저 권하는 석 잔의 술.

후래선배(後來先杯): 술자리에서 늦게 온 사람에게 먼저 권하는 잔.

주령배(酒令杯):예전에 쓰던 술잔의 한 가지. 속에 오뚝이 같은 인형이 있어 술을 부으면 그 인형이 떠서 잔 뚜껑의 구멍 밖으로 머리를 내밀게 되는데, 인형이 향하는 쪽에 있는 사람이 술을 마신다.

전배(餞杯):석별의 정을 나누며 마시는 술, 혹은 그 술잔.

 

■ 주체와 관련된 술잔의 명칭

 

천배(天杯):임금이 하사하는 술잔. 일명 사배(賜杯)라고도 한다.

 

■ 술이 든 상태와 관련된 술잔의 명칭

 

호상(壺狀):술이 들어 있는 술잔.

호성(壺醒):술이 들어 있는 술병과 술잔.

냉배(冷杯):찬 술을 따르는 술잔.

잔배(盞杯):잔에 마시다 남긴 술잔인데 첨배(添杯), 첨잔(添盞)이라고도 한다.

독배(毒杯):독이 든 술잔. 독배를 들다 독약을 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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