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음주는 무엇인가

지혜로운 음주는 무엇인가

 

박정근(문학박사, 소설가, 극작가, 시인, 칼럼니스트)

 

 

바람을 쐬러 동해안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바라보는 양양의 겨울바다는 무척 아름다웠다. 기온이 내려간 탓에 해변에는 겨울 여행을 온 서너 명의 관광객들이 거닐 뿐 한적하기 짝이 없었다. 너무 쓸쓸하지만 이것이 겨울바다의 정취가 아닐까 생각하며 썰렁한 분위기를 이겨내려고 노력했다.

 

양양 서핑 해변은 여름이라면 비키니를 입은 여인들이 아름다운 몸매를 뽐내려고 한껏 폼을 잡고 오가던 곳이었다. 쓸쓸한 곳에서 여름의 화려한 광경을 상상하니 고독의 유령들이 뒷걸음을 치며 물러나는 듯 했다. 화무십일홍이라는 운명에 맞서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여인들은 일 년 내내 몸을 가꾸어 여름 한철 해변에 와서 꽃처럼 아름다운 자신의 육체미를 뽐내고 싶어 하지 않는가. 뜨거운 태양 아래 이글거리는 욕망을 가슴에 담고 뭇 남성들의 시선을 끌어당기려는 공주병의 여인들의 모습에 대한 상상은 고독한 장년의 사나이의 기분을 살려주는 치유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행복한 상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회오리를 치며 필자를 강타했다. 정신이 번쩍 들고 나른 둘러싸고 있던 상상의 장막을 쓸고 가버렸다. 넓은 해변에 덩그러니 서있는 현실의 나를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래사장 저 편에서 일행들이 날이 추우니 빨리 숙소로 가자고 손짓하며 성화를 내고 있었다. 발길을 돌리는 필자는 달했던 여름해변이 차가운 겨울바람만 부는 쓸쓸한 곳으로 변해버리다니 인생이란 얼마나 허무한가를 느낄 뿐이었다.

동료가 예약한 숙소는 해변을 바라보는 아파트였다. 십여 명의 지인들이 돈을 모아서 마련했는데 돌아가면서 사용한다고 했다. 짐을 풀고 나니 메밀국수 한 그릇으로 점심을 때운 탓에 출출해졌다. 시장에서 사온 생선으로 횟감을 준비하시는 일행분이 술상을 차리라고 야단이고 다른 동료는 마트에서 사온 호박으로 전을 부치며 부산을 떤다. 비어있던 식탁에는 어느덧 먹음직한 안주로 가득해졌다. 실에 바늘이 따라오듯이 안주에는 술이 따라와야 한다. 여행팀이 모두 식탁에 앉아 건배를 제안한다. 아름다운 겨울여행을 위하여! 라고 모두 소리친다. 술이 두어 순배 돌아가자 흥겨움이 점점 고조된다.

필자는 바다를 향하고 있는 발코니 쪽으로 다가가서 조금 전에 거닐던 해변을 바라보았다. 창문 옆에 놓여있는 쌍안경이 눈에 띄었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쌍안경으로 해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해변의 건물, 나무들, 표식용 부유물들이 한 눈에 뚜렷하게 보였다.

그렇다면 여름에 와서 해변을 바라본다면 어떤 광경이 펼쳐질까. 잠시 상상을 하자 쓸쓸했던 마음이 따뜻한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아름다운 연인들이 손을 잡고 해변을 거니는 모습이 이 해변을 진한 총천연색으로 어떻게 물들일까. 아마도 해변은 명랑한 젊은 여인들의 수다와 깔깔거리는 웃음으로 가득 차리라.

 

필자는 여행팀에게 은근하게 물었다. 여러분, 올 여름에 다시 와서 이 쌍안경으로 창문을 통해 해변을 바라본다면 어떤 장면이 펼쳐질까요. 아직 멋진 체격을 유지하고 있는 동료가 소리쳤다. 몸매가 아름다운 여인들이 비키니를 입고 섹시하게 거니는 모습이 보이겠지요. 정말 아름다울 거예요. 아무리 늙어가는 우리들이지만 인생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 올 여름에 다시 한 번 양양비치 여행을 추진합시다! 그의 얼굴에는 젊음의 에너지가 솟아나와 은근하게 번지고 있었다.

 

양양여행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떠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동년배의 친구들이 지연이나 학연의 돈독함을 더하자는 것도 더더욱 아니다. 단지 세상을 보는 정의로운 관점을 공유하자는 마음으로 떠나온 편안함이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인간적인 신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연배를 떠나서 술을 함께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도연명의 시 수정시상(酬丁柴桑:유시상의 증시에 감사하며)을 떠올리며 술을 청했다.

 

放歡一遇, 만나면 한껏 즐거워하고

旣醉還休. 취하면 돌아가 쉬리라

實欣心期, 마음이 서로 맞으니 정말 즐거워

方從我遊. 나와 함께 사귀는 것이리라

 

술이 몇 순배 돌자 필자는 최근 술자리가 잦은 탓에 취기가 저절로 돌았다. 잠시 쉬겠다고 눈을 감았는데 숙면에 들어버렸다. 새벽에 갈증을 느끼며 눈을 떴을 때 어젯밤 잠시 휴식을 위하여 자리를 떠난 것이 잠자리가 되어버린 것을 깨달았다. 일행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즐겁게 술을 마시다 잠이 들었으니 그것 또한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런 다툼이나 오해 없이 멋지게 술자리를 즐겼으니 말이다. 즐거운 술자리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술꾼의 지혜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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