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폭탄주는 당연한 귀결
김원하의 취중진담
어제도 마시고 오늘도 마셨으니 내일 또한 마셔야 되는 것이 세밑의 주당들의 풍경이다. 술 마시는 것이 지겹고 힘들다는 푸념도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마실 수 있는 건강과 여건이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돈이 있어도 마실 수 있는 건강이 허락하지 않은 사람, 세밑인데도 누구 하나 만나자는 연락도 없어 쓸쓸하게 세밑을 보내는 사람에 비하면 행복한 것 아닌가.
망년회니 동창회니 하는 모임이 술자리 대신 점차 연극이나 영화를 보는 문화로 바뀌고 있다지만 아직도 많은 직장인들은 고전적인 회식문화를 즐겨하고 있다. 이는 우리민족은 오래전부터 관·혼·상례에서 술을 빼놓고는 치룰수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오죽하면 제사를 지낼 때 술을 구하지 못해 술 대신 우물물을 떠다 놓고 지내면서도 물이라 하지 않고 ‘현주(玄酒)’라 하지 않았던가.
그러다 보니 큰일을 치룰 때 술은 필수조건이 되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송년회를 갖는 다는 것은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중요한 일과 중 하나다.
연말이 되면 작취미성(昨醉未醒)인 상태로 출근을 하고, 어찌어찌하여 겨우 몸을 추스르게 되면 또 술자리에 나가 폭탄주까지 마셔야 되는 것이 직장인들의 연말 풍경이다. 직장을 잡지 못했거나 이미 직장을 떠난 사람들에게는 이 또한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회식자리에서 소주잔이 몇 순배 돌고 나면 으레 벌어지는 일이 폭탄주를 제조해서 돌리는 일이다. 이제 폭탄주는 우리의 새로운 음주문화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 같다. 중·장년층은 물론 젊은 층에서도 폭탄주가 성행하고 있다고 식품의약품안전청은 밝혔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지난 6월과 10월 만 15세 이상 남녀 2066명을 대상으로 ‘주류 소비·섭취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 최근 1년 사이 폭탄주를 1잔 이상 마신 경험은 20대에서 49.2%로 가장 높았다고 밝혔다.
일반적으로 폭탄주를 마시면 알코올이 체내에 빨리 흡수되어 좋지 않다고 하지만 주당사회(酒黨社會)에서는 점차 증가하고 있는 추세가 아닌가. 이는 우리의 비빔문화와 무관치 않을 듯싶다.
비빔밥은 융합식품으로 장수식품이란 인식이 널리 퍼져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가 국제선에서 제공하는 기내식에서 인기 있는 식사다. 이어령 이대 석좌교수도 그의 저서 <디지로그>에서 “비빔밥 문화야말로 우리 문화의 진수이며, 맛의 교양곡”이라 예찬한 바 있다.
비빔밥의 역사는 200여년 남짓이라고 하지만 웰빙식으로 각광 받고 있는 것은 다양한 식재료가 어우러져 오묘한 맛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주당들이 즐겨 마시는 폭탄주 역시 비빔밥처럼 여러 가지 술을 섞어 마시는 것이어서 본래의 술 맛 보다 다른 맛을 느끼기 위함일 것이다.
그런데 묘한 것은 폭탄주와 비슷하게 제조되어 판매되는 술은 인기가 없다는 것. 몇 해 전 백세주에 소주를 타서 제조한 50세주 폭탄주가 유행하자 술 제조회사가 50세주를 출하했지만 인기를 끌지 못했었다.
맥주잔에 소주나 양주 같은 핵을 먼저 붓고 맥주를 적당량 넣어 마시는 폭탄주가 주당들로부터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술자리에서 직접 제조(?)하는 데서부터 묘한 심리가 발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폭탄주 제조는 지역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고, 연령층 마다 다소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이를 테면 한국관광공사 이 참 사장의 ‘삼관주(막걸리, 맥주, 소주를 각 6대 3대 1 비율로 섞은 폭탄주 위에 고춧가루를 뿌린다)’ 같은 것이다.
이 사장이 ‘삼관주’를 제조 할 때는 그야말로 진지하다. 폭탄주 위에 고춧가루를 뿌리는 이유에 대해 이 사장은 “술을 마시면 비타민이 파괴되는데 고춧가루는 파괴된 비타민을 보충하고, 발간색은 악귀를 물리치는 효험(?)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듣다보면 저절로 손이 간다.
폭탄주도 어느 면에서는 통합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가. 이번 대선에서도 민심이 갈라진 영·호남 사람들이 만나서 폭탄주라도 한 잔 마시며 통합을 외치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