空술 한 잔 보고 십 리 간다

김원하의 취중진담

 

空술 한 잔 보고 십 리 간다

 

 

조미료보다는 아지노모토(味の素)가 도시락보다는 벤토가 입에 배던 시절, 주머니가 가벼운 주당들은 와리깡(わりかん)으로 술을 마셨다. 당시엔 지금의 더치페이(Dutch pay) 같은 말들이 익숙지 않아 일본어의 잔재를 그대로 사용했다. 소데나시(袖無し) 대신 민소매로 자리 잡듯이 이제는 오히려 와리깡이라면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고 더치페이로 하자면 빨리 알아듣는다.

각자 내는 것과 관련해 ‘붐빠이’라는 말도 사용된다. 음식을 먹거나 술을 마신 뒤 “야, 오늘 붐빠이 하자”고 하는 경우다. ‘붐빠이’ 또는 ‘뿜빠이’는 분배(分配)의 일본식 발음(ぶんぱい)에서 유래한 것이다. ‘더치페이’나 ‘붐빠이’보다 우리말인 ‘각자내기’로 부르는 것이 좋겠다.

아직도 나이든 어르신들은 더치페이 대신 추렴(出斂)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 또한 여러 사람이 돈이나 물건 따위를 얼마씩 나누어 낸다는 뜻에서는 같은 의미지만 뉘앙스가 약간 다르다.

비용을 각자 서로 부담한다는 것을 이르는 말인 더치페이(Dutch pay)가 영어인줄 알고 사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 말은 ‘더치 트리트(Dutch treat)’에서 유래한 말이다. 더치(Dutch)란 ‘네덜란드의’ 또는 ‘네덜란드 사람’을, 트리트(treat)는 ‘한턱내기’ 또는 ‘대접’을 뜻한다. 더치 트리트는 다른 사람에게 한턱을 내거나 대접하는 네덜란드인의 관습이었다.

따지고 보면 더치페이는 영국인들이 네덜란드인들이 인색한 사람들이라고 조롱하기 위서 시작된 말인데 오늘날 각자 내기의 상식어가 되었다.

더치페이에 반대되는 말이 아마 ‘내가 낼게’일 것이다. 중국어를 배울 때 중국어 선생이 중국어 가운데 가장 듣기 좋은 말이 ‘워 칭커(我请客 wǒqǐngkè)라고 해서 멋도 모르고 중국집에 친구들과 함께 가서 “워 칭커”라고 했다가 음식 값을 몽땅 지불한 적이 있다. ‘워 칭커’는 우리말로 ‘내가 쏠께’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말이다.

근자에 들어와서 老․小 불문하고 술값이나 밥값을 더치페이로 하는 문화가 일상화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아직도 라떼를 찾는 꼰대들 가운데는 술 마시고 나서 “오늘 술값은 N빵(N분의 1)으로 하자”는 말을 못해 지갑을 먼저 여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필자도 그 중 하나다.

그런데 인터넷에 떠 있는 글을 보고 세상 참 많이도 변했다는 생각을 가졌다.

요즘 새내기 가운데는 더치페이로 하기로 한 회식이 끝나고 “전 술 안 마셨으니 N분의1할 때 술값 빼주세요”라고 요구하는 신입생들이 있어 선배들이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이 글을 본 사람들은 “요즘 MZ세대들 사이에서는 N분의 1 개념이 조금 달라진 건가요?”라는 반문을 한다. 술 안 먹었으니 술값은 빼달라고 할 거면 회식자리에 참석을 하지 말던지….

“술 안마시고 안주 많이 먹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거까지는 왜 셈 안 하냐” 이런 논쟁(?)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N분의 1’ 방식도 완전한 해답은 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주당들은 술 마시는 핑계는 다양하다. 누가 술 한 잔 사겠다면 자다가도 일어나 달려간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空술 한 잔 보고 십 리 간다.”는 말은 아닐까.

내 돈은 냈지만 어딘가 空술 같은 느낌이 드는 술자리가 있다. 이를 테면 술내기로 마시는 술, 회비내고 먹는 술, 상갓집이나 잔치집에서 마시는 술(따지고 보면 진정 공짜 술은 아니지만) 따위가 있지 않을까.

세상에서 공술만큼 맛있는 술도 없다. 직장에서의 회식, 혹 거래처 등에서 받는 접대 술은 공술이다. 술값 걱정 없으니 부어라 마셔라 한다. 그러다 보면 공술은 자칫 과음을 불러올 수 있고, 언제가 대가를 치를 수 있다는 점에서 신경이 써지는 술자리다.

가끔 언론에 나오는 공술로 망신을 당하는 공직자들도 많다. 특히 공직에 있는 사람이 거한 술대접을 받았다면 거의 몇 배의 대가를 치를 수 있다는 점에서 신경 써지는 술자리라고 할 수 있다.

제 돈 내고 술 한번 사지 않는 친구가 공술 먹을 수 있는 자리에선 마치 자기가 술사는 것처럼 술을 강권하는 친구도 있다. 꼴 볼견 주당 중 하나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제 돈내고 술사면서 술 안먹는다고 시비 거는 주사(酒邪)가 심한 사람이 술 산다면 공술이라도 피하고 싶다.

<삶과술 발행인 ti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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