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석정에 얽힌 술에 대한 단상

포석정에 얽힌 술에 대한 단상

 

 

박정근(문학박사, 작가, 시인, 칼럼니스트)

 

포석정은《삼국사기》,《삼국유사》,《고려사》등에서 왕들이 술을 마시며 놀이를 즐기던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신라의 경애왕이 술을 마시며 즐기다 후백제의 왕 견훤의 공격을 받아 잡혀 죽은 사건과 연관이 되어있다. 경애왕은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술을 마시며 질탕하게 놀았다는 기록 때문에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지닌 포석정은 문화적 가치를 긍정적으로 획득하지 못하고 망국의 상징으로 여겨져 부정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경애왕은 신라 천년 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는 포석정에서 주지육림을 즐기다가 나라를 패망에 이르게 했다는 이유로 견훤과 더불어 패륜의 왕이라는 오명을 지니고 있다. 적군이 수도를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포석정에서 신하와 많은 여인들을 대동하고 술을 마시다가 체포되어 시해되었기 때문에 왕으로서 자질이 부족한 인물로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백제의 왕 견훤은 포석정에서 술을 질탕 마시고 있는 경애왕을 습격하여 죽음에 이르게 했을 뿐 아니라 군사를 풀어 노략질과 강간 등을 자행하게 했으니 경애왕과 견훤 두 인물은 후삼국시대 권력자로서 부정적인 면모에서 쌍벽을 이루는 것이다.

권력자들이 술과 여자를 즐기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권력을 이용하여 부를 쌓고 그가 확보한 금력과 무력으로 부도덕한 술자리나 여색을 취하는 것이 다반사이다. 하지만 술과 여색을 과하게 즐기는 권력자는 그리 끝이 좋지 않다는 것은 역사가 말해준다. 경애왕은 자신의 죽음이 목전에 다가왔다는 것도 모르고 여인들과 술을 마시다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다. 견훤도 그런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후백제라는 새로운 국가의 지도자로서 새 역사를 만들기 위해 혁명적인 사상과 행위를 하지 못하고 망국의 길에 접어든 신리의 관직을 이용한 다소 퇴행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는 신라의 군관으로서 그 조직을 흡수하여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권력양위 문제로 장자인 신검에게 금산사에 갇혀 있다가 고려로 탈출하여 목숨을 구하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흥미로운 점은 포석정이 왕족과 귀족들이 술자리의 낭만적 재미를 가미하기 위해 특별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즉, 수로에 흐르고 있는 물 위에 술잔을 띄워놓고 시를 짓는 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이 놀이는 유상곡수연이라고 불린다. 본래 유상곡수연은 술과 문학이 어우러진 고상한 귀족적인 놀이였다.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술잔이 자기 앞에 오면 시를 한 수 읊어야 하는 풍류놀이였다. 시를 짓지 못하는 경우 술을 석 잔을 마시는 벌칙이 주어졌다고 한다.

 

역사적 사료에 의하면 놀이의 유래는 천 년 전 중국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중국에는 그러한 유적을 발견할 수 없고 다행히 규모가 작은 것으로 신라에 남아있어 경애왕의 방탕과 연루된 곳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헌강왕과 같은 현군은 화랑과 같은 인재를 발굴하는 데 포석정을 사용했다, 그는 인재들과 인문학을 즐기며 흥에 겨워 술을 마시고 춤을 추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고 있다. 반면에 경애왕과 같은 탕군은 여인과 술을 즐기기 위한 장소로 악용하였던 것이다.

 

술이란 신이 창조한 것 중에서 최고의 음식이라고 평가하지만 술을 마시는 방식에 따라서 최악의 음식으로 전락할 수 있다. 헌강왕처럼 적절하게 즐긴다면 술은 인간의 인문학적 상상력을 가동하게 하여 멋진 문학작품을 생산하게 하게 한다. 이런 경우 술은 인간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하게 하여 동참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음식으로 활용된다. 헌강왕은 시를 짓지 못하는 신하들에게 창조적인 능력을 발휘하도록 석 잔의 술을 벌로 내렸다고 하니 이 또한 얼마나 유쾌한 일인가.

여기에 반해 몰락해가는 왕국에 대해 자포자기적으로 대응하던 경애왕은 술을 현실 도피적 수단으로 사용했다. 결국 그는 왕국을 패망하게 한 장본인으로 포석정이 지니고 있던 종교적 제사장의 의미도 상실하고 오히려 술의 희생자로만 남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술잔이 흐르던 포석정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지만 수모를 당한 사건의 당사자들은 흙이 되어 사라지고 없다. 우리는 포석정에 내재하고 있는 긍정적인 의미를 창출해야 한다. 포석정에서 인문학적 놀이로 시를 짓게 하고 진정한 축제정신을 발흥시켰던 헌강왕의 자취를 되살려야 하는 것이다.

 

사진 : 남산계곡에서 흘러 들어오는 입구에 거북 모양의 돌이 있었고, 그 입구에서 물이 나오도록 만들어졌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져 정확한 형태는 알수 없게 되었고, 삼국유사에 헌강왕이 이곳에 와서 남산 신의 춤을 따라 어무상심무(御舞祥審舞)라는 신라춤을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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