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台祐 교수의 특별기고
술의 신(酒神) 디오니소스 신화 이야기(44)
도시 디오니시아제
‘도시 Dionysia제’는 Dionysia 가운데 가장 늦게 형성된 것으로 비교적 후대의 관점인 아르콘(Archōn,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행정을 맡았던 고위 행정관)이 그 행사를 관장했다. 그것이 아테네의 대표적인 Dionysia로 확립된 것은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 시대인 기원전 6세기 중엽 이후였을 것으로 보인다.
‘도시 Dionysia제’는 엘레우테레우스(Eleuthereus)에서 온 디오니소스의 첫 도착을 재연하는 것이었다. ‘도시 Dionysia제’는 매해 엘라우테라이의 디오니소스를 아테네로 모셔와 영접하고 신을 즐겁게 해드리려는 목적으로 도시의 중심부에서 거행된 축제의식이었다. 이 축제는 신을 영접하는 축제의 핵심인 경연 이전 식전행사에 해당하는 프로아곤(Proagon)과 전체 축제에 해당하는 경연인 아곤(Agon)으로 분리되어 진행된다.
즉 신의 영접(eisagoge), 디오니소스의 나무 상을 들고 희생제를 치르기 위한 디오니소스 성소까지의 종교적 행렬(pompe), 저녁에 축하 잔치(komos) 형태로 구성되며, 비극과 희극의 드라마 경연(agone)으로 진행되었다. 연극경연 전 아테네인들은 ‘도시 Dionysia제’의 종교적 제식에 전쟁고아의 완전무장한 갑옷을 입고 펼친 행진, 동맹시에서 온 공물전시, 명예의 관수여 등 도시적 행사를 추가하면서 통합된 데모스의 이상을 표출 하였던 것이다.
‘도시 Dionysia제’는 민주적 폴리스 삶 안에서 민주적 체제를 유지한 도시적 행사였으며 디오니소스적 제식이 함축된 축제였다. ‘도시 Dionysia제’는 아테네인들의 자의식의 성장을 보여주는 동시에 도시의 권위 그리고 정치적 우월성을 도시적 행사를 통해 표현했으며, 민주정 체제 속에서 국가와 개인 시민간의 상호간의 의무와 유대관계 형식인 선행과 감사를 통한 ‘보여주는 행사’였던 것이다. ‘도시 Dionysia제’ 축제가 열리는 며칠 동안은 인간과 디오니소스 신간의 만남과 소통을 통한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환희와 해방감을 누린 디오니소스 축제였다.
요약하면 ‘도시 Dionysia 축제’는 엘라페볼리온 달(the month of Elaphebolion) 9일에 시작하는데, 제의 시작 며칠 전에 아테네의 디오니소스 신전으로부터 아카데미아의 한 성소로 옮겨졌던 디오니소스 엘레우테레우스(Dionysus Eleuthereus) 신상이 엘리페볼리온 달 8일 저녁이나 9일에 다시 아테네 신전으로 귀환하는 행렬이 거행된다.
10일에는 제물과 남근 상을 포함하는 행렬이 벌어지고 디오니소스 극장 부근의 제단에서는 제사가 거행되었으며, 제물 음식과 포도주를 곁들인 연회와 떠들썩한 가무가 진행되었다. 다음에는 11, 12, 13일의 3일 동안 비극과 희극경연이 공연되었다. 도시 Dionysia의 연극경연에는 레나이아와 달리 아테네 시민 이외의 거류 외인이나 외국인도 관람할 수 있었다.
농촌에서 시작되는 ‘Dionysia 축제’는 3~4월경 아테네에서 열리는 ‘대(大) Dionysia 축제’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새롭게 일을 시작하기 전, 풍요를 기원하며 실컷 놀아두려는 봄맞이 농촌 축제가 마침내 그리스 세계의 중심 도시 아테네에서 열리는 것이다. 일주일 동안 열리는 이 축제의 꽃은 단연 비극 경연대회다.
축제의 넷째 날부터 3일 동안 열리는 비극 경연대회에는 세 명의 비극 시인이 하루를 제 몫으로 받아 비극 3부작과 사튀로스 극 한편을 상연한다. 이 경연대회에서 우승하는 시인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개선장군이나 올림피아 경기에서 월계관을 받는 운동선수처럼, 크나큰 명예를 얻는다. 그리스 비극의 3대 작가라고 하는 아이스퀼로스(13번 우승), 소포클레스(18번), 에우리피데스(3번)도 바로 ‘대 Dionysia 축제’가 배출한 시인들이다.
이렇듯 4월의 잔혹함을 돋우기 위해 고대 그리스인들은 Dionysos 신을 숭배하는 제의를 열었다. 11~12월에는 농촌 ‘Dionysia 축제’가, 1~2월에는 ‘레나이아 축제’가, 2~3월에는 ‘안테스테리아 축제’가 있었다. 겨울철 농한기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겠지만, 무엇보다도 얼어붙어 잠들어 있는 땅을 깨우고, 풍성한 결실을 기원하기 위해서였다. 축제 기간 동안 사람들이 남근을 찬양하는 각종 의식을 벌였던 것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를 자극하여 풍요로운 생산력을 발산하게 할 목적이었음에 분명하다.
이 제전의 주신은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 다른 이름으로 바쿠스다. 그러니 축제 동안 포도주가 빠질 리 없다.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행진하며 디오니소스를 찬양하는 디튀람보스를 흥겹게 부른다. 겨우 내내 잠들었던 대지여 깨어나라! 그런 뜻이다. 이때 디오니소스의 수행원인 사튀로스를 흉내 낸 광대들이 군중들 사이를 휘젓고 다니며 뛰논다.
그들은 초인적으로 발기한 거대 남근을 과시하는 염소의 하체를 입고 있었다. 이미 포도주로 얼큰하게 달아오른 군중들과 광대들은 한데 어울려 음란하고 방탕한 분위기에 도취되어 춤추고 노래하며, 마음껏 깔깔댄다. 얼어붙어 있던 대지에 관음(觀淫) 거리를 제공하여, 나긋나긋 몸을 좀 풀고, 촉촉이 젖으라고 얼러대는 전위행위라고나 할까? 4월의 잔인함은 가이아의 참을 수 없는 절정이라 하겠다.
‘Dionysia 축제’ 행렬은 극장을 향했을 것이고, 극장에 도착하면 디오니소스에게 제물을 드리는 제의로 이어졌을 법하다. 물론 염소로. 사람들은 봄을 맞이하며 농사와 각종 생산 활동이 잘 되도록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린다. 신들에게 풍요의 은총을 받기 위해선, 신이 기뻐하도록 인간은 경건하고 깨끗해야 한다.
그렇다면 개인과 집단, 그리고 도시 전체의 정화를 위한 제사를 드릴 것이다. 부정한 요소를 모두 씻어내고, 깨끗이 정화된 상태가 될 때만, 새롭게 일하기를 결심하고, 신에게 풍요를 기원할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정화를 ‘카타르시스(Catharsis)’라 한다.
‘Dionysia 축제’의 제의적 전통은 비극에 앞선 식전 세리머니 형식에서 비극 내부로 흡수되었을지도 모른다. 염소를 죽여 바치는 별도의 제의를 대신해서, 비극 자체가 제의로 발전했다는 말이다. 그리스 비극엔 춤추고 노래하는 코러스와 코러스를 이끄는 지휘자가 있다. 그들은 마치 제사장처럼 비극을 이끈다. 그리고 그들과 묻고 답하는 배우가 등장한다. 배우가 무대 위에 살려내는 등장인물(persona)들은 연민과 공포를 일으키는 끔찍한 일을 겪거나, 저지른다.
트로이아 전쟁의 최고 사령관 아가멤논(Agamemnon)은 그의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Klytaimnestra)의 도끼에 찍혀 죽는다. 딸 이피게네이아(Iphigeneia)를 아르테미스(Artemis) 여신에게 제물로 바쳐 죽였음에 대한 어머니로서의 보복이었다. 아가멤논의 자식 오레스테스(Orestes)와 엘렉트라(Elektra)는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 클뤼타임네스트라의 가슴에 칼을 꽂는다. 메데이아(Medea)는 남편 이아손의 배신을 보복하기 위해 두 아들을 몸소 죽인다. 자기 남편을 죽인 원수, 그런 줄도 모르고 결혼했는데, 알고 보니 그는 자기의 친아들 오이디푸스, 이오카스테(Iocaste)는 이 끔찍한 운명에 엮인 자신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모든 죽음의 현장을 코러스는 숙연히 지키고 있다. 마치 제사장이나 사제들처럼 그들은 비극의 주인공을 제물로 바치며 집단적인 제사를 집행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스인들은 비극을 관람하며, 끔찍하고 부정한 운명에 엮인 인물을 피로 물들임으로써 자신들과 사회 전체를 정화하려 했는지 모르겠다.
부정을 제거하기 위한 희생양의 제사, 그것이 비극이었다. 그렇다면 비극은 봄을 깨끗하고 새롭게 맞이하는 그리스인들의 사회적 카타르시스다. 제우스의 섬광에 타 죽어가던 세멜레의 태중에서 제우스의 허벅지로 옮겨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디오니소스에게 비극을 바치면서, 정화를 위해 부활의 봄을 노래한 것이다.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
호메로스는 그의 대서사시 <일리아스(Ilias)>에서 크레타(Crete) 섬의 아름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포도주 빛 바다의 한가운데 떠 있는 섬, 물에 둘러싸인 크레타 섬은 아름답고 비옥하다…. 그 섬의 도시들 중에는 위대한 제우스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고, 미노스(Minos)가 9년 주기로 다스린 대도시 크노소스(Palace of Knossos)가 있다.”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신비로운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곳이 바로 ‘크레타 섬’이다. 크레타를 빼놓고 고대 그리스를 이야기 할 수 없다. 크레타는 고대 그리스의 ‘자궁’과 같은 곳이다. 고대 그리스 문명의 최초의 기원이 바로 ‘크레타 섬’에서 발흥한 미노아 문명(Minoan civilization)이기 때문이다. BC. 3650년부터 BC. 1170까지 융성하고 유지되었던 미노아 문명은 기원전 2000년경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중심으로 형성된 미케네 문명 이전의 역사를 확실하게 채워 주었다. 제우스는 ‘신들의 신’이다. 그가 태어난 곳이 크레타 섬이었다는 신화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 세계에서 처음으로 문명화된 집단이 크레타에서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세상의 창조자이자, 주재자인 제우스의 최초의 자손임을 선포함으로써 최고신의 권위와 위엄을 제일 먼저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크레타 섬은 에게 해 남단부 중앙에 있는 작은 섬이다. 하지만 이 작은 섬에서 문명의 맹아가 발아했고, 여러 신화와 함께 그리스 문명의 단초가 된다. 크레타 섬은 그리스 신화의 주신 제우스가 태어나 양육된 곳이고, ‘유럽’이란 말의 어원이 된 ‘에우로파(Europa)’가 제우스의 세 아들 미노스(Minos), 라다만티스(Radamanthys), 사르페돈(Sarpedon)을 낳은 곳이다.
파시파에와 미노타우로스
크레타 섬 하면 흔히 전설 속 괴물 ‘미노타우로스(Minotauros)’를 떠올린다. 미노타우로스 이야기는 일견 신화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역사적 비유로 생각할 때, 그것은 단순한 신화가 아닌 크레타 문명의 역사를 다룬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노타우로스는 ‘미노스의 황소’라는 뜻이다. 소의 머리와 인간의 몸, 발굽과 꼬리를 가진 황소 괴물을 이렇게 부른 데에는 애초에 이 괴물이 미노스 왕으로 인해 생겨났기 때문일 것이다.
크레타의 왕이 된 미노스(Minos)는 파시파에(Pasiphae)와 결혼했는데, 이후 미노타우로스의 탄생과 죽음에 관련된 신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노스는 형제들과의 세력 다툼에서 자신의 우월함을 보이고자, 바다의 신 포세이돈 신에게 서원을 부탁하게 된다. 포세이돈은 이에 황소를 한 마리 보내주고 이 소를 산 제물로 바칠 것을 약속 받는다. 하지만 막상 소를 받아보니 사람들이 미노스를 하늘이 보낸 왕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고, 게다가 황소까지 탐이 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 소를 산 제물로 바치지 않고 다른 소를 대신 바치게 된다. 그러자 포세이돈은 화가 나서 저주를 내려 ‘미노스의 황소’는 아주 흉포하고 맹렬하여 감히 접근을 할 수 없는 괴물 소로 만들어 버렸다. 이 황소는 크레타 섬을 본거지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길길이 날뛰면 그 힘이 엄청나서 감히 가까이 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말이 황소지 무시무시한 식인적 괴물이었다. 엄청나게 강한 뿔로 바위를 들이 받으면 바위가 맥없이 부서졌고, 어쩌다 그 뿔에 받힌 사람은 맥없이 수십 미터는 나가떨어지곤 했다. 뿐만 아니라 거추장스러운 것이 나타나면 코로 불을 뿜어내어 만일 이 불에 스치면 시커멓게 타버리곤 했다.
삼지창으로 상징된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인간이 속이는 일을 모를 리 없다.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던 바다의 포세이돈은 심히 노하여 다른 소 떼 속에 숨겨져 있던 그 황소를 찾아내어 이렇게 미쳐 날뛰게 만들어 버렸다. 그것도 아주 난폭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 이후로 이 황소는 미쳐 날뛰기 시작했는데, 감히 어느 누구도 황소에게 접근할 수도 없었고, 나타나기만 하면 재빨리 숨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황소가 코로 내뿜는 불 바람에 맞기만 하면 여지없이 시커멓게 타버린 시체로 변하고 말았다. 이 미친 황소가 온 크레타를 휩쓸고 다니자 사람들은 공포에 떨며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기 바빴다.
화가 난 포세이돈의 저주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포세이돈의 저주로 인해 이 황소를 본 미노스 왕의 아내인 파시파에(Pasiphae)로 하여금 황소에게 정욕을 품게 만들어 버렸다. 마침 아프로디테 역시 미노스의 아내가 자신에게 제사를 게을리 하는 것에 화가 나 있었던 참이었다. 분노한 두 신은 미노스 부부를 벌하기로 했다. 그것은 파시파에의 부모는 모두 티탄족 2세들로서 그녀 역시 신의 혈통을 이어받은 여신 혹은 요정에 가깝다. 신전의 여사제일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나름 파워가 있는 여성으로 생각되어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미모도 부럽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아프로디테가 파시파에의 머리와 가슴은 온통 포세이돈의 황소에 대한 욕정으로 가득 차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게 주술을 부렸다. 하지만 이게 어디 가능한 일이겠는가? 하지만 당시 크레타에는 그리스 최고의 기술자 다이달로스(Daedalos)가 살인죄를 저질러 도망쳐 와 있었다. 파시파에는 다이달로스에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고 방법을 찾아달라고 애원하였다. 다이달로스는 최고의 기술자답게 진짜 암소와 흡사한 모습의 가짜 암소를 만들었다. 물론 내장이 있고 간이 있는 진짜 암소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겉모습은 암소 그대로였다. 재료는 나무였고 텅 비었으며 바퀴가 달려서 움직이는 것도 가능했다. 그 위에 암소 가죽을 씌었다.
욕정에 눈이 먼 파시파에는 내장 부위쯤에 있는 문을 열고 비어 있는 가짜 암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천천히 움직여 평소에 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곳으로 이동하였다. 얼마 뒤 문제의 황소가 파시파에 암소에게 다가와 미리 만들어둔 구멍으로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는 수간(獸姦) 행위를 했다. 이렇게 수간을 통해 탄생한 것이 미노타우로스(Minotauros) 라고 불리는 황소 괴물이다. 황소와 인간이 관계를 맺었으니 생긴 것도 인간과 황소를 닮은 것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 황소의 씨를 받은 미노스 왕의 아내 파시파에는 잉태를 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몸은 틀림없는 사람인데 머리는 여지없이 황소를 닮은 괴물이었다. 반인반수의 기괴한 형상을 한 아이였다. 수간으로 미노타우로스를 낳은 파시파에는 물론이고 미노스도 황당하고 놀랐다. 그래서 미노스는 이 일에 대해 신탁을 청했다. 원인이 포세이돈의 분노 때문임을 안 미노스는 어쩔 수 없이 미노타우로스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미노스 왕은 그 이름을 ‘미노타우로스’라고 이름 지었으니, 크레타에 황소의 자식이 태어났다는 의미이다. 왕은 너무나 창피하였지만 어쨌든 자식인지라 죽일 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