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음주역사, 음주패턴, 그리고 음주문제 대책

세계의 음주문화와 알코올 정책 연구②

 

인도의 음주역사, 음주패턴,

그리고 음주문제 대책

 

조성기(아우르연구소 소장/경제학 박사)

 

조성기(趙聖基, Surnggie Cho) PhD. of Economics. MPH.

▴원주한살림, 이사장 ▴살림농산, 대표이사 ▴생명농업, 이사 ▴아우르연구소, 대표연구원

▴한국대학생알코올문제예방협회, 회장 ▴한국할랄산업연구원, 이사

 

 

고대인도의 술은 일반인의 음료가 아니라 의식과 특별 접대의 대상이었다.

음주가 법적으로 금지되지는 않았지만 취한다는 자체는 비난의 대상이었다. 금주자는 존경의 대상이었다. 고귀한 브라만들에게는 금주가 권장되었다. 끄샤트리아, 바이시아, 수드라와 같은 다른 카스트들에게는 술이 허용되었다. 물론 일반적 상황이 아니라 특별한 상황에서 허용된 것이었다.

불교는 승려들과 사원에서의 금주를 계율로 하였다. 기원전 185년에 아쇼까왕은 불교를 확장시켰고, 금주가 기본적인 교리 중 하나가 되었다. 금주가 교리가 된 이유는 이미 그 시대가 되었을 때 술이 중요한 사회문제 중 하나가 되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8세기에서 12세기까지는 힌두교의 시대였다. 정통 베다의 관점과 그 이후에 발흥한 불교와 자이나교 등이 조화를 이루는 시기였다.

그 시대는 종교의 종합화 시대로 정의할 수 있다. 이 때 인도사회에서 술 소비가 일반화된다. 당시에는 인도의 가정에서 술을 만들었다.

우리나라가 주세법 일반화 이전에 가정에서 가양주가 며느리들에게 전수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주로 알코올 농도가 낮은 맥주가 제조되었다. 그 시대의 이야기책 수크란티사라(Sukrantisara)에는 발효기술이 자세히 적혀있다. 전사 집단의 음주는 물론이고 축제날에는 여성들에게 까지 음주가 허용되었다고 한다. 인도에서 술이 역사의 초기에는 특정집단의 전유물이었다가 10세기를 전후해서 일반인들에게 점차 확대되어 간 것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고려시대 쯤이다.

 

그 후 인도에 이슬람교국가가 설립되었다. 인도에 정착하여 제국을 건설한 종족은 무굴 족이었다. 무굴 인도에서는 페르시아어가 궁중의 문자로 사용되었고, 엘리트들의 언어였다. 술에 대한 무굴왕조의 입장은 매우 엄격했지만 시간이 가면서 차츰 와인은 허용하게 되었다. 코란에서 엄격하게 금주를 지지했지만 인도에 오자 현실은 어느 정도 달라졌던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슬람교와 힌두교도들은 일반적으로 금주를 선호했다. 그 입장은 변함이 없었다. 종교의 힘은 참 강했다.

 

 

인도에서 술 문화가 바뀐 것은 영국의 식민통치 때문이었다.

 

조선도 주막의 탁주 문화가 희석식 소주 주도로 바뀐 것이 통상 일제강점기의 주세령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총독부가 통치자금과 만주전쟁 자금을 위해 주세를 강력히 걷었다는 것이다.

영국의 동인도회사, 식민지 정부는 인도에 주류업체를 설립했다. 인도국민의회는 정부가 술을 덜마시도록 통제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영국은 ‘인도절제위원회’를 1905년에 설치하고 주세를 부과했다. 표면적으로는 비싼 가격 때문에 음주를 꺼려 덜마시도록 하자는 핑계를 대고 세금을 걷겠다는 논리였다. 역시 그 보다는 그 속에 식민통치의 재원을 조달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렇게 조달된 주세가 독립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독립된 인도정부도 재원이 필요했던 것이다. 주세는 모든 정부들이 쉽게 자원을 조달할 수 있는 정책수단이었고 인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인도의 독립을 위해 여러 세력들이 독립운동을 했다. 그 중 인도국민의회는 전통적인 종교적 금기대로 금주를 지지하였다. 금주 운동은 20세기 초 해외 교육을 받은 지도자들도 지지했다. 그들은 서구에서 절주나 금주 활동을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낮은 카스트 사람들은 음주가 허용된 계급이었고, 여성은 자유를 찾는 투쟁과 무관한 사람들이었었지만 지도층에 의해 계획적으로 금주운동과 독립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전에는 인도에서 절주운동이란 사회운동이 없었다. 절주운동이 독립 투쟁의 한 부분으로서 역할을 담당했다. 그 결과 금주가 헌법에 구체화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전쟁이었다. 인도는 1차 세계대전에 독립을 담보받기 위해 참전했다. 전쟁은 참전한 많은 인도청년이 공포와 피로감을 줄이도록 술을 권했고, 술을 마시게 되었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오는 병사들은 음주습관도 함께 가지고 돌아오게 되었다. 특별상점에서는 현역병사에게나 은퇴한 병사에게 정부보조가격으로 술을 싸게 팔았다. 지금도 그러한 저가 판매 관습이 계속되고 있다. 전쟁이 인도인들의 음주규범을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엘리트들의 음주와 전쟁이 인도인을 술 취하게 하였다.

 

‘인도행정청(Indian Civil Service)’에 취직한 서구식 교육받은 상층 카스트의 인도인들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쯤에 숫자가 많지는 않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인도에서는 이 때 알코올이 통치자들과 동일시되는 신분의 상징으로 둔갑했다. 베다시대의 궁정에서도 사실 그랬다. 귀족들이 마시던 술이 이제 행정적 통치자들과 그들과 교류하는 사람들의 상징물로 변해버렸던 것이다. 영국지배의 상징인 행정청의 관리들, 전쟁에 참여한 병사들, 영국에 유학한 왕족들 등 선택받은 인도인들은 전시 중에나 여가를 즐기는 시간에 술을 마시는 습관을 가지게 된 것이다. 문화는 그런 이벤트와 삶 속에서 바뀐다.

 

2차 세계대전 때에 인도군은 아시아지역과 유럽지역에서 전쟁에 참여했다. 거기에서 인도병사들은 알코올을 많이 접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습관적 음주를 하기 시작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큰 전쟁이 인도인들의 음주문화를 완전히 바꾼 것이다. 아마도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들도 서양의 위스키나 베트남의 독한 쌀 술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1935년에는 인도에 지방자치가 허용되었다. 정치적인 대화가 계속 진행되었고, 국회는 연방의 모든 지방 주들에서 금주를 입법하고자 하였다. 독립 후 인도에서는 연방헌법에도 금주조항을 집어넣도록 하였다. 인도는 큰 나라였고 지방정부의 통치자원도 필요해서 알코올에 대한 정책이 지방정부의 일로 되었다. 각 주정부마다 각각 주법을 별도로 만들었다. 인도국민의회는 독립이후 즉시 연방과 각 지방에서 집권을 했다. 그러니 정치권이 일원화되어 이제 연방과 주정부에서 술 문제에 대해 갈등이 없을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였다. 1951년 까지 뭄바이 정부와 마드라스 정부는 금주조항을 채택했다. 그런데 다른 주 의회에서는 알코올의 생산이나 소비가 별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법제화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통치재원도 필요했고 말이다. 연방정부의 생각과 달리 일부 주를 제외하고는 실제로 금주조항을 법으로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인도인의 음주 모습과 음주문화은 지역마다 아주 다르다.

 

우리나라와는 달랐다. 인도는 알코올을 사회적 대화나 식사자리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다. 종교에서나 의례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의미에서 보면 인도에는 음주를 하는 정해진 형태나 방식, 음주에 대한 태도 등 자체가 없었다. 대체로 받아들여지는 음주규범이 없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인도사회는 다양화 사회이기 때문에 문화적 패턴과 이데올로기적 패턴이 다분히 다중적이다.

유일하게 음주패턴이 정형화 되어 보이는 곳은 원주민 거주지다. 전체 인구의 8.8%정도인 원주민들은 북동지방, 북중부지방, 남부의 도서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다. 원주민들은 알코올을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로 생각하고 신에게 바쳐져야 한다고 여긴다. 본도족(Bondo)과 무리아족(Muria)의 사람들은 술을 대지의 우유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음주는 의무이자 기쁨이다.

 

또한 원주민들은 술을 마술로부터 풀어주는 해독제로 생각한다. 알코올이 적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주고, 적을 공격하기도 하고 질병을 막아주기도 한다. 술은 권위이자 신성한 것이다. 중부지방 비샤까파트남 (Vishakapatnam)의 콘다도라 사람들 (Kodadoras)에게 술은 협상, 결혼의례 등 중요한 일에 필요한 것이다. 코야족 사람들(Koryas)도 결혼식에서 팜열매 술인 토디(toddy)로 축복을 한다. 이혼, 재혼, 죽음, 갈등해소, 각종 회의 등에서 술을 마신다.

토디 주는 분쟁도 해결하고, 죽었던 우정을 다시 살리는 일도 하게 한다. 이 같은 음주문화는 첸추족, 야나디스 프라단족, 곤드족, 빌족, 오라온족 등의 원주민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인도의 원주민에서는 술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 원주민들에게 습관성 음주벽이 있었다는 정보도 있다. 당연한 일이다. 첸추족의 사내가 술을 탐닉하다가 술이 없어지자 딸을 팔아서 마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인도의 많은 원주민 부족들은 술이 신과의 접촉, 삶의 행복, 영양분을 주는 것으로 이해했다.

 

원주민 집단은 불법 증류주도 마셔왔다. 북동부 지방에서는 70% 증류주를 자가제조해서 마신다. 마다야 지방이나 오릿사 사람들은 6-10%정도의 술을 마신다. 인도인들의 술은 단백질, 칼슘, 비타민, 철분 등의 함유량이 제법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식으로서의 음주는 힌두교의 여러 종파들에게서 발견된다. 탄트라(Tantric) 종파에서 관능적 탐닉행위 때 음주한다. 샥티(Shakti) 종파는 여신들에게 술을 바치고, 의식집행자들도 술을 마신다. 이들 힌두교도들은 무당들에게 필요한 술과 물질을 주면 그들이 삶을 통제해 준다고 믿는다. 그들은 술을 의례 집행자들의 의식수준을 변화시키도록 하는 힘이 있는 물질로 이해하였다.

독립 이후 인도에서는 알코올음료의 법적 인정 폭이 점점 커져왔다. 그래도 ‘인도의 음주문화는 이런 것이다’라고 일반화하기에는 술을 마시는 지역이 많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인도인에게 음주가 일반적인 일이라고 보기 힘든 상황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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