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 설 연휴를 지나
임재철 칼럼니스트
올해 설엔 설 연휴의 쓸쓸함이 마음을 짓누른 며칠이었다. 타향살이인 서울 생활 수십 년 동안 고향을 향해 바쁘게 달려간 발걸음을 아직 멈추지 못했지만, 옛 시절 그날들이 그리움으로 다가서는 것은 나이가 들었는지 어쩔 수가 없다.
이제는 설 명절이면 며칠 전부터 고향 갈 준비를 하고 빳빳한 새 돈을 바꾸어 부모님께 그리고 친지들에게 내밀던 기쁨도 없다. 현재 부친은 병상에 계시고 모친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계신다.
모친이 계실 때 설날에 가면 직접 가꾸신 무로 담근 시원한 동치미에 맛있는 떡국을 먹고 산소에 가고 집안의 손님들도 맞이하고 참으로 정 깊었는데 이제는 그런 일이 없다. 그저 그리울 뿐이다. 부모님이 사셨던 집은 비어 있고 어머님이 계시던 방에는 예전 병석에 계실 때 쓰시던 접이식 침대와 사진 몇 장이 걸려 있다. 자식들 잊지 않으려고 수십 번 이름을 쓰시고, 친척들 전화번호를 적고 또 외우시며, 물을 주고 옷을 덮어 녹두 나물을 키우시던 그 방은 텅 비어 있다.
명절에 대한 설렘과 따뜻함이 예전 같지 않다는 점에서 삶에 대한 연민과 회한까지 느껴진다. 가는 세월을 이길 장사 없고 어느 누구도 막을 수가 없으니 아니, 모든 게 이 순간에도 저만큼 가고 있는 거다. 그런데 명절이 아니더라도 겨울만 되면 왜 이렇게 엄마의 동치미와 백김치가 먹고 싶을까. 다시 먹을 수 없는 종갓집 엄마표 레시피, 두고두고 그립고 또한 후회막급이다.
사랑의 모친이 세상을 떠나신 지 벌써 14년이 넘었지만 어머님의 손맛은 평생 소중한 보물처럼 안고 살아가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어머님이 이른 봄부터 손수 어린 쑥을 캐서 장만하시던 쑥떡, 고소한 콩가루 냄새를 풍기던 인절미의 말랑말랑한 촉감, 살얼음이 살짝 얼어서 뱃속까지 시원하던 식혜 등 더없이 풍성했던 설날 풍경이 이렇게 생생한 영상으로 뇌리에 남아 성난 파도처럼 일렁인다. 이제 더는 먹을 수 없다는 중얼거림이 눈물로 변한다.
하지만 무겁고 쓸쓸한 필자와는 달리 설 연휴는 바쁜 일상에 익숙한 한국인에게 꿀맛 같은 재충전의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대개는 명절날 가족이나 친척이 한 자리에 모이면 취직, 승진, 결혼, 출산, 진학과 같은 덕담이 오간다. 반면에 듣고 싶지 않은 가령, 공부는 잘 돼 가냐, 여자 친구는 있냐는 등 꼰대 같은 얘기도 나온다. 말하자면 결혼은 언제 할 거야, 요즘 무슨 일 하냐는 등 불편한 질문이 잇따른다. 그래서 명절에는 개인적인 질문을 삼가는 것도 한 방법이 아닌지 모르겠다. 필자 역시 그런 꼰대가 분명하다.
이런 설명절의 휴식과 연휴의 이면에 가려진 민심의 동향을 보면 지나칠 정도로 흉흉하고 냉랭하지 않았나 싶다. 말하자면 언제부턴가 우리 내부가 완전히 두 개의 진영으로 확연하게 갈라져 있음이다. 거기에다 국가 운영 관련 의사결정 메커니즘의 민주적 절차 무시와 파행적 행위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사정 기구를 통한 재갈 물리기와 거부권 남발로 민주적 토론과 정책 경쟁이 사라지고 민심이 거부되는 시대다. 즉, 최고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고, 오로지 정권 유지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형국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술좌석에서 흔히들 정치판을 두고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는 게 너무 역겹고 싫다는 말에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더욱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점은 갈수록 성장 동력이 고갈되면서 이에 따른 불확실성이 한층 더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돌파할 수 있는 전환점이 보이지 않은데다 오히려 정치가 국가의 장래를 얽어매고 있는 그 해묵은 실타래를 풀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가 어느 때보다 높은 것이다.
무엇보다 미래 세대가 지금 세대보다 더 풍족하고 더 자랑스러운 국가에서 살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연휴로 며칠 멈춘 사이에도 하루가 다르게 세계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다시 엔진을 가동하고 경쟁 최전선에서 뛰어들어야 한다. 갈라진 민심이 당장 합쳐지지는 않겠지만 중간 민생 지대에 있는 무리가 동조할 수 있는 그런 비전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미 지구촌은 선거 열기로 달아오르고 있다. 가장 먼저 지난달 대만 총통과 의회 선거가 세계적인 관심을 끌면서 마침표를 찍었다. 연이어 인도·러시아·미국 등의 순으로 우리와 이해관계가 큰 선거가 예정돼 있어 결과에 따라 엄청난 변화는 불가피하다. 곧 선거가 닥치는 한국 역시 지금처럼 국가가 역주행 하고 있는 시점에서 어떤 변화가 만들어질 것인지 주목된다.
게다가 글로벌 경제 전망은 여전히 긍정보다 부정이 대세다. 양대 축인 미국과 중국의 경제 여건에 대한 평가가 호의적이지 않다. 다만 급격한 추락은 없겠지만 성장 속도가 느려질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불확실성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불안이 한동안 지속될 것이 분명한 한국 경제에 대한 전망도 널뛰기를 거듭하고 있다.
그런저런 새해 설 연휴에 느끼는 알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참 쓸쓸함과 씁쓸함의 소용돌이에서 한편으로 푹 익어 버린 겨울도 지났으니 무언가 삶에 대한 소중함을 돌아보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쓸쓸해하지 말고 아니 그 쓸쓸함을 딛고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모두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는 다짐과 마음으로 하루하루 일상을 분주하게 걸어 가기를 바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