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하의 취중진담
딱! 한 잔만 더
“딱! 한 잔만 더” 이 말은 주당들이 2차 가자는 말이다. 이 꾐(?)에 걸려들면 10중 8․9는 꽐라되기 십상이다.
주당들 가운데는 상습 적인 거짓말쟁이들이 많다. 고주망태로 집에 돌아와서 마누라한테는 친구 만나서 ‘딱! 한 잔 했다’고 한다. 거짓말이다.
오랜만에 마난 친구 만나서 하는 말도 “우리 술 한 잔 할까”다. 그러다가 한 잔이 아니라 밤새도록 부어라마셔라 한다.
술 마시자는 말이 언제부터인가 ‘술 한 잔’으로 통한다. 이 어원에 대해 궁금증이 발동하여 여기저기 자료를 들쳐보고 물어보니 이런 의견으로 집약되었다.
‘술 한 잔’하자고 할 때의 ‘한 잔’은 사실 ‘한 잔’에 가깝다. 한국어 맞춤법에 따르면 ‘한 번’은 횟수를 뜻하지만, ‘한번’은 시도를 뜻한다. ‘한 번 해봤어’ 와 ‘한번 해봤어’가 다르다는 얘기다. ‘한 번 해봤어는’는 어떤 행위를 1회만 해봤다는 얘기지만, ‘한번 해봤어’는 그 행위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궁금해서 시도해봤다는 얘기다.-조성기 박사.
필자가 생각건대 술은 처음부터 조금씩 마시는 것이지 퍼 마시는 것이 아니어서 ‘술 한 잔’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조선 중기의 시인이자 정치인이며 학자였던 정철(鄭澈)도 그의 장진주사(將進酒辭)에서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산 놓고 무진무진 먹세 그려….
정철도 한 잔으로 시작한다. 정철이 무진무진 먹자고 한 말은 시쳇말로 끝까지 달려보자는 뜻은 아닐까.
정철의 술에 대한 일화는 많다. 그 중 대표적인 일화가 ‘은잔’이라고 생각된다.
아직까지 정 씨 문중에 전해져 내려오는 정철의 ‘銀 술잔’ 이야기에 따르면 조선 14대 임금 선조는 정철이 술을 너무 마셔대서 몸이 상할까봐 ‘하루에 이 잔으로 한 잔씩만 마셔라’는 당부를 하면서 은잔을 하사 했다고 한다.
정철에게 직접 하사한 술잔은 복숭아 모양의 잔과 얇은 원형의 접시 같은 받침, 그리고 그 사이에 놓는 고리 형태의 받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정철은 임금이 총애하는 신하였기에 임금은 술잔을 하사하면서 하루에 한 잔만 마시도록 당부했다. 한 잔 정도라면 신하가 과히 취하지 않을 거라 안심하면서 말이다. 헌데, 며칠 후 그 정승을 만난 임금은 놀랐고, 격노했다. 정철은 다시 만취되어 조정에 나왔기 때문이다. 임금이 물었다. “그 잔으로 한 잔만 마셨더냐?” “네” “그런데 어찌 그렇게 대취했는가?”
정철은 은술잔을 하사 받고 술잔 안벽을 두드려 늘렸다. 작은 잔을 냉면사발만하게 늘려 만든 거다. 그러니 한 잔은 한 잔인데, 큰 대접으로 한 잔이 된 것이다. 대단한 발상 아닌가.
싱어송라이터윤건이 10여 년 전에 <딱 한 잔만>을 불렀다.
‘딱 한 잔만, 한 잔만, 술 한 잔에 널 담아 마신 밤 골목길 내리는 빗소리 들으며, 마신다 널 듣는다… 한 잔 비우고 또 채우고 널 비우고 또 채워…비도 오지 않고 밤도 아닌데… 캬~ 좋다!’
‘딱! 한 잔만 더’가 주당들에게 얼마나 친근한 말이기에 주점 옥호로 사용하는 술집도 많은 모양이다.
흔히 사용하는 말 가운데 ‘술이 술을 먹는다’는 말이 있다. 따지고 보면 식사를 하면서 마시는 반주로 취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 “우리 딱! 한 잔만 하고 가세”에서 본격적인 술이 시작된다.
오가는 술잔 속에 정담이 묻어나다가 어느 순간 거칠어진 말투가 튀어나오고 욕설이 나오면 술자리는 난장판이 된다. 술자리에서 하지 말라는 정치, 종교, 돈 자랑이 원인일 때가 많다니 이 또한 아리송한 일이다.
그러면 술자리에선 어떤 주제를 놓고 술을 마셔야 하는가? 남자라면 군대얘기나 축구얘기를 하겠지만 이를 듣는 여친은 지겨울 것이다.
젊은이들이 모인 술자리에선 웃음꽃이 만발하고 머리 허연 중늙은이들의 모임에선 건강이 최고라며 따라 놓은 술잔이 식어간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여보게 “딱! 한 잔만 더”라는 소리를 듣던 때가 그립다.
강연 여행 작가인 오평선이 그랬던가. ‘그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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