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장에서 튀어나온 술이야기
박정근(황야문학 주간, 대진대교수 역임, 작가, 시인)

술은 종종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주제이다. 삶을 구가하는 자리에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술은 분명 생명의 상징이다. 하지만 술은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장례식장에도 빠질 수 없는 소재가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이전의 칼럼에서 박영근시인의 술과 관련된 일화를 소개한 바 있다. 그는 분명 생전에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술자리로 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존재였다. 그런데 그가 47세 젊은 나이에 결핵성 뇌수막염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의 시를 사랑하는 많은 문인들이 장례식장에 문상을 왔다. 시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장례식장에서도 술 이야기는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필자는 망자의 친형으로서 장례식장을 지키는 상주로 조객들을 끊임없이 맞이했다. 조문을 하는 문인들은 대부분 그의 술 이야기를 꺼냈다. 물론 그들은 지나친 음주로 그의 죽음이 너무 일찍 빨리 왔음을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조객의 입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한 말은 “죽기 전에 그렇게 좋아했던 술을 조금이라도 더 사줄걸!”이었다. 참으로 아이러닉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지나친 음주로 죽은 망자에게 더 술을 사주었어야 했다고 자책하는 말이 얼마나 부조리한 말인가.
아무리 뛰어난 시인이라도 원고료로 살아간다면 경제적 어려움을 피할 수 없다. 시인은 운명처럼 가난을 끼고 살아갔다. 먹는 것이 부실하니 자연히 시인의 몸은 불가피하게 병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가 다른 문인들에게 술을 사라고 요청한 것이 가난한 자의 마땅한 권리는 아니다.
그리고 서로 아끼는 문우들끼리 서로 술을 한잔 사라고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큰 하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잦은 빈도수나 기나긴 술자리 시간 등이 일상인들에게 부담스럽게 여겨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술자리 횟수가 거듭될수록 즐겁던 분위기에서 조금씩 부담이 커져 피하고 싶은 자리로 변질되었다고 본다.
이런 문맥에서 박영근은 시인으로서는 존경하지만 취해서 부리는 술주정으로 인해 기피하고 싶은 인물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제안한 술자리를 갖자는 요청을 몇 번 거부하는 상황이 반복되었으리라. 아마도 그런 경험을 한 문인들이 그의 술주정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와 거리를 두는 사이에 박영근은 병을 얻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문득 시인의 부고를 접한 문인들에게 어떤 마음이 다가왔을까. 그따위 술값이 뭐가 대단하다고 시인의 절박한 마음을 못 읽고 만남을 거절한 자신의 비정함이 마음에 걸렸던 것 같다.
그런데 왜 문인들은 술 때문에 먼저 죽음의 길을 간 시인에게 술을 더 사주고 싶었을까. 박영근은 단지 술을 더 마시기 위해서 문인들에게 술을 사라고 요청한 것은 아니라고 느끼지 않았을까.
각박해지는 세상에서 술은 사람들의 마음을 이어주는 가교적 역할을 한다. 술을 통해서 마음의 문을 열고 사랑과 우정을 주고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모든 게 돈으로 환산이 되고 인간의 가치가 돈에 의해서 세속화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인은 사라져가는 인간적 유대를 이어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문학적 동지들조차도 친구의 우정이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소홀히 하고 내팽개치려고 하는 비인간화의 길로 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런 각박한 사회에서 갑자기 시인은 길을 잃어버렸다고 본다.
문인들은 박영근이 죽음의 긴 여행을 떠나버린 장례식장에서 그의 문학적 메시지를 깨달았으리라. 그들은 떠나가는 시인의 손을 잡고 싶다. 그리고 그들이 놓아버린 마음의 끈을 이어서 죽음의 길을 떠나버린 시인을 다시 소환하고 싶다.
하지만 죽음의 길은 한번 가면 돌아올 수 없는 실존의 세계이다. 그들은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이지만 어느 순간도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시인의 영전에 술 한 잔 따르고 술에 취한 환상 속에서나마 그를 붙들고 싶어 한다.
취함과 깨어남의 사이에서 극히 짧은 순간 시인은 오는 듯하다. 하지만 도취에서 깨어나 보면 그는 사라지고 없다. 도취 속에서 그들에게 삶과 죽음이 매우 가까워 보이지만 술에서 깨어나는 순간 둘 사이의 거리는 하늘과 땅의 간극처럼 너무 멀어 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시인이 그들 곁을 영원히 떠나버렸다는 걸 비로소 인식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우리는 신이 최고의 걸작품인 술을 두고 왜 이렇게 찬반 논쟁을 벌이는 것인가. 사실 술 자체가 나빠서라기보다는 그것을 탐닉하는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비극과 희극일 뿐이다.
술은 잘 활용하면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최고의 보약이 된다. 인간들의 지나친 스트레스를 풀어주어 심적 고통으로부터 해방을 맛보게 한다. 대표적으로 축제 때에 술을 마시고 일상으로부터 일탈을 통한 자유를 체험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좌절과 슬픔으로 힘들 때 술을 지나치게 마시는 경우 술은 보약이 아닌 독약이 되는 것이다. 독자들은 술을 절제함으로써 보약처럼 마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