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마시면 가수가 되시던 고모부

 

박정근(문학박사, 소설가, 극작가, 시인, 황야문학 주간)

 

 

박정근 교수

고향에 들러 부안군 동진면에 사는 고종사촌 누님을 방문했다. 오랜만에 그녀의 얼굴을 보니 옛날 고모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다. 필자의 생각이 저절로 가까이 살던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갔다. 키가 작지만 체격이 크시던 고모가 다시 환생한 듯 한 느낌을 받았다. 고모 부부는 매우 금실이 좋은 커플이었다. 두 부부는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고 재미난 농담을 가끔 하던 고모에 비해 고모부는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벌써 팔순이 된 누님과 함께 초등학교 시절 부안군 행안면 월성부락 시절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모 집은 부안군 행안면에 소재한 본가 바로 옆집에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누님과 옛날 고모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그의 술버릇에 대해 생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고모부는 아주 부지런한 농부였다. 새벽부터 일어나 논에 나가서 일을 보고 돌아오시면 말없이 들판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기시곤 했다. 지금도 그의 평화로운 모습이 눈에 선하다. 삽자루 하나 어깨에 메고 농로를 따라 걸어가시던 고모부는 마치 거인처럼 위대해 보였다.

 

둘째 아들인 용희가 초등학교 동창이라서 가끔 댁에 가면 “정근이 왔니?” 한 마디 이외에는 좀처럼 말이 없으셨다. 초등학교 조카에게 무슨 할 말이 있을까마는 과묵한 모습에 접근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안방에서 목침을 베고 노동으로 피곤한 몸을 푸시면서 코를 골며 주무시던 고모부. 그에게 무슨 고민이 있었으랴 생각하겠지만 그에게도 농사 걱정, 자식 걱정이 끊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농사를 지어서 자식들 진학 뒷바라지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고모부는 가끔 부안읍에서 술을 드시고 들길을 따라 귀가하셨다. 그는 거나하게 취하셔서 몸을 비척거리며 휘청휘청 걸어오시곤 했다. 마치 걸음에 박자를 맞추시는지 제법 듣기에 좋았다. 하루 종일 들판에서 일하시는 고모부가 그런 흥이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했다. 고모부의 노래는 밤에 들으면 더 낭만적이었다. 저녁 술자리가 길어지면 어둑해진 들길을 하염없이 걸어오시는 것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밤공기에 잘 울려 퍼지는 효과가 있었다.

 

고모부가 가장 애창하는 십팔번 노래는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이었다. 특히 동네에 들어서면 언제나 이 노래를 시작했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발길, 지나온 자국마다 눈물 고였다. 선창가 고동소리….”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고모부를 마을의 가수라고 칭하며 웃음을 짓곤 했다. 그의 노래에는 삶의 고단함에서 오는 애수가 잔뜩 깔려있어 동네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던 것이다.

고모부는 매우 가난했지만 건실하셔서 작부 집에 가서 술을 마실 위인이 못 되었다. 그저 읍내에 나가면 시장을 보고 선술집에나 가서 막걸리 두어 주전자를 들이켜고 돌아오는 것이 전부였다. 돈이 없어 시원치 않은 안주에 술만 들이켰으니 얼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말짱한 정신으로 마을로 돌아오기에는 거의 이십리나 되는 귀갓길은 지루하게 느꼈을 것이다.

선술집을 나서 걷기 시작하면 취기가 오르기 시작한다. 부안 읍내를 빠져나와 산길을 지나 들길을 지나간다.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오면 기분이 좋아진다. 취기는 고모부의 흥을 점점 발동시켜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얼마 되지 않는 농사로 자식들을 양육하고 진학을 시키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다. 가난한 농부의 고달픈 삶이 취중에 걷다가 설움이 되어 가슴에 맺힌다.

 

울컥 솟아오르는 설움을 눈물로 보이기에는 장부로서 거인의 마음에 허락하지 않는다. 오히려 눈물을 삼키며 노래로 승화시키는 희극적인 연상을 시도한다. 사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농부로 살아가며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과 오순도순 살아가면 되었잖은가. 굳이 세속적으로 성공을 할 필요는 없다.

형편이 좋은 집안 아이들이 도회로 진학을 하는 것을 보면 자식들이 안타깝지만 운명으로 여기는 농군의 삶은 하늘을 우러러 떳떳하지 않은가. 그는 마음을 다지며 집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며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국마다 눈물 고였다….”라고 노래하는 것이다.

 

취중의 노래는 다른 노래로 이어지고 어느덧 동네가 보인다. 멀리 동네 한 가운데에 있는 집에 불이 켜있다. 고모부는 다시 상념에 잠기기 시작한다. 고모와 자식들에게 넉넉하게 못 해준 못난 남편이고 아버지라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등록금을 제때 못 내서 눈물을 흘리는 자식을 호통을 친 일이 후회가 되기도 한다. 그는 푸념하는 가운데 마치 자식이 앞에 있는 양 어르고 야단도 치며 자신의 무능함을 변명하기에 바쁘다. 동네에 다 왔는데도 그의 푸념은 멈추지 않고 허공에 삿대질을 하며 일인극을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고모부의 노래와 푸념소리가 들리면 집안에서 키득거리며 그의 어설픈 연기를 즐기곤 했다. 할아버지는 고모부의 주정이 민망하여 혀를 끌끌하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시곤 했다. 노래에 연이은 일인 극은 대문 앞까지 지속되었다가 고모가 집안으로 그를 밀고 들어가서야 끝이 났다. 그의 푸념 소리를 분석해보면 고모부의 고민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다.

 

고모부의 취중 푸념은 마음에 맺혔던 한을 풀어내는 일종의 제의가 아닐 수 없다. 고모부의 마음에서 가난이 베어낸 심적 상처의 고름을 스스로 뱉어내고 치유하는 효과가 있다. 술이 인간에게 유익한 효과란 바로 견디기 어려운 현실의 고통을 잊고 다시 재생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물론 과음을 하면 몸에 해롭기 때문에 절제를 전제로 가능한 일이라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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