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때가 왔습니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임재철 칼럼니스트

 

이대로 분하고 억울해서 하루인들 더 살겠습니까?

언제까지 우리 모두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정신으로 의료대란과 민생대란을 견뎌야 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반국가세력들이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는 섬뜩한 나라에서 살아야 할까. 배추 한 포기에 29800원, 시금치 한 단이 15000원이 넘는다는 것이 가짜뉴스가 아니고 실화인 나라, 온통 뉴라이트 천지가 되고 ‘사람 잡는 선무당(生巫殺人)’이 거시기인 이 땅에서 살아가기가 무진 겁이 난다.

참! 다시 말해, 원론적이고 단순 명쾌한 생각으로는 세상을 나쁘게 만드는 놈들 쓸어낼 수만 있다면 좋겠다. 자고 나면 온갖 조잡하기 짝이 없는 뉴스들에 나라꼴이 부끄럽고, ‘의료시스템붕괴’로 응급실이 무너졌고, 후속진료·배후진료도 무너져 버렸다. 상상하기 싫지만 ‘의료대란’은 아주 오래갈 것 같다. 그러니까 언제든 누구라도 응급 상황에 처할 수 있고 우리 모두 진료 공백 사태의 잠재적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사회적 위기 상황이다.

세상사 바람 바람인데, 숨죽이고 만 살아야 하는 세상인가. 대한민국은 어디에 있는가? 매사 무대포와 우격다짐이 판을 치는 이 땅. 현장을 떠나버린 의사, 위협받는 국민 생명… 요즘 같은 시기에 아프면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아니, 이제 아프면 손도 못 쓰고 죽는다. 술 한 잔, 커피 한 잔에도 역사가 있고 스토리가 있고 땀과 눈물과 희망이 있는데 ‘안녕 하세요’ ‘식사 하셨습니까’가 아니라 ‘아프신 데 없지요’ ‘아프지 맙시다’로 바뀐 세태의 사실이 너무 우울하다.

참참! 나라가 더 갈 데 없이 누추해지고 있다. 국민살이 참담하다. 보자. 무릇 권한에는 책임이 따르건만, 권한만 누리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권력자의 모습이 횡행하고 있다. 다만 거부권이 믿음직해 보인다. 게다가 선출되거나 임명되지 않은 이는 법으로 정해진 권한과 책임도 없으면서 정부 기관을 거느리고 많은 공식 비공식적 역할을 수행하며 마치 대통령 행세를 하고 다니는 특별한 이 나라다. 이러다가 주권자인 국민이 가짜 선동에 중독되어 그 독성에 마비되고 무감각해지는 최악의 정치체제로 타락하지 않을까 두렵다.

 

그 뿐인가. 한마디로 보수·진보를 가리지 않고 대다수 국민들이 분노하는 괴이한 시절이다. 국민적 참사가 일어나도 사람이 죽어 나가도 국가는 없다. 잘못하고도 잘못인 줄을 모른다. 고치려는 생각도 없다. 역사의식도 없다. 사안의 충분한 예고도 의견수렴도 토론도 설명도 없다.

최소한 정치 지도자는 과정과 결과에 대해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지만 상황과 역할에 대해 그마저 횡설수설 거짓말해 놓고도 뻔뻔하고 안이하다. 그러니 나라의 현실과 장래가 참으로 절망이다.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라는 책을 쓴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은 헌법이나 실정법이 아니라 상호관용(mutual tolerance)과 제도적 자제(institutional forbearance)의 규범”이라고 해석한다. 상호관용은 자기와 다른 의견을 인정‧수용하는 열린 사고를 뜻하고, 제도적 자제는 실정법적 권리를 신중하게 행사하는 분별력 있는 태도를 가리킨다.

하지만 지금 국가적 정치와 리더십은 마이웨이 극단적 원맨쇼다. 고집불통, 안하무인식 권력 행사를 본인만 모르고 있는 거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경고했다. “민주주의가 타락하면 우민(愚民)정치가 된다.” 물극필반(物極必反)… 관용과 자제를 내버리고 제 욕심껏 극단으로 치달으면 반드시 극단의 실패에 이르게 되는 것이 세상살이의 이치다.

베이비붐세대의 정점에서 산업화와 민주화의 한 일원으로 세상을 걸어온 필자로서는 세간의 추한 일이 화무십일홍(花无十日红)이요,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로 현재의 고난을 받아들여 보고도 싶지만, 그런 나라 안팎 고통의 내러티브가 분명 아니라는 생각이다. 홧김에 독도소주에 일본 맥주를 마니 젊은 날에 읽었던 시가 떠오른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Herbsttag)이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시고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늦은 열매들을 익게 하시고/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그들을 완성시켜 주십시오/(중략)

그러니까 그 시절엔 청춘의 방황과 고독, 존재에 대한 의문, 삶 속의 이유 없는 슬픔 등이 묻어났던 시로 기억된다. 물론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렇지만 그 얘기가 아니다. 이미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는 고물가 고유가 고환율 고금리로 밑뿌리부터 흔들리는 민생경제, 묻지마식 굴종외교, 정부의 모든 국정 운영 방식의 난맥상,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범죄 행각, 하물며 베일에 가려져 있는 계엄 음모에 분노가 치민다.

 

하여 필자는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얻고 불의한 권력과 폭주 열차에 제동을 걸어야 할 때라는 생각이다. 즉, 그들의 종말과 위중한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해 행동으로 말할 때인 거다. 이에 바람직한 국익과 평화의 미래를 향한 결단과 변화를 추동 할 수 있는 간절한 소망기도를 올린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LEAVE A REPLY

Please enter your comment!
Please enter your name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