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맥주와 전주가맥



유상우의 에세이

한국맥주와 전주가맥

 

한국맥주 백년사

맥주는 서구문물의 도입과 함께 19세기에 각 나라의 개항지에 퍼지기 시작했다. 일본의 삿포로, 아사히, 에비스와 중국의 칭다오 등이 동아시아에 맥주의 물꼬를 내기 시작했다.

한국은 일본의 자본이 진출하여 1933년 조선맥주가 그리고 1934년에 소화기린맥주가 상륙했다.

시인 백석의 수필 ‘동해’에 보면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신다는 대목이 나온다. 식민지시절 맥주는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술은 아니었을 것이다. 돈이 있는 일본인이나 식민지 지식인들이 마시던 맥주는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 공장이 관리된다. 이후 1945년 11월부터 일본인들이 남긴 재고 원료를 사용하여 맥주를 재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50년 6·25 동란으로 맥주를 만들 수 있는 설비들이 많이 파괴되어 합성맥주나 외국맥주가 득세하다가, 1952년에 완전한 민간기업으로 전환한다. 이후 1953년부터 본격적인 생산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외화가 없어 아이러니하게도 맥주의 국산화작업이 이루어진다.

1957년 맥주원료의 국산화로 보리를 재배하여 맥아를 만들기 시작했다.

맥아공장의 결실은 1962년 한국맥아공업(주)이 가동하며 본격적인 국산맥아가 공급되기 시작한다.

호프는 강원도 대화군에서 재배가 시작되었고, 맥주병은 1958년 해남초자공업(주)에서 생산했다.

이후 독일의 기술을 배워오며,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려는 노력이 진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경제력 있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많지 않았다.

이에 맥주회사에서는 1957년부터 미군에 군납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미군의 맥주수요는 생각보다 많아서 우리나라의 맥주스타일이 변하는 계기가 되었다.

1930년대 일본에 의해 세워진 맥주공장은 독일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에일계열(상면발효)의 맥주였다. 이러한 맥주가 해방 이후에도 계속 생산이 되었다. 그러나 미군은 에일계열보다는 라거계열(하면발효)을 선호하였다. 이에 맥주회사에서는 부진한 내수를 만회하고자 과감하게 미국인이 좋아하는 라거스타일의 맥주로 전환 했다. 그 후 라거계열의 맥주가 현재까지도 우리나라 거의 대부분 맥주스타일을 점하고 있다.

1970년대 들어서며 맥주는 폭발적인 성장을 한다. 이는 경제성장의 결과이다. 맥주생산량은 비약적으로 늘었으며 기존 양사체재의 맥주회사는 1974년 한독맥주주식회사의 출현으로 3사체재로 변경된다. 1977년 조선맥주에 합병되며 양사체재로 바뀌지만 산업화와 함께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맥주는 더욱 활성화된다.

1971년 전체 주류 판매액의 5.3%에 불과하던 맥주는 1979년 탁주 51.5%에 이어 23.3%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다.

특히 1970년대 후반에는 전년대비 30% 이상의 성장을 구가하였으며, 맥주의 품귀현상마저 발생했다.

맥주는 1980년대에 막걸리를 누르고 드디어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판매량을 자랑하는 술로 등극을 했으며 이후 현재까지 그 자리를 누구에게도 넘겨주고 있지 않다.

전주의 맥주

전주의 맥주문화가 싹튼 것은 1980년대 초반 전북 최대의 서점이었던 홍지서림 지하에 활주로가 생기면서부터이다. 당시 젊은이들은 비상구가 필요했다. 시대는 군사독재로 암울하였고 젊은 욕구는 넘쳐나는데 분출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당시 송골매나 활주로 등 주로 하늘을 나는 것들이 젊은 문화의 아이콘이지 않았나 추측해본다.

통키타와 생맥주문화는 급속하게 전국을 강타했고 전주도 통키타와 장발 그리고 맥주가 젊은이들의 트랜드가 되었다.

물론 막걸리집이 전주는 더 드세었던 것 같다. 당시 정읍집, 신후문집, 풍남집 등의 막걸리집들이 활주로의 도전을 뿌리치며 치고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전주의 경제력으로는 생맥주집을 떠받치고 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전주의 맥주는 가맥이라는 문화로 변주해나간다.

이후 전주의 생맥주집은 1980년 후반에서 1990년대 초에 활짝 꽃피운다. 주로 전주시내 중심의 지하에 생맥주집이 포진했다. 1980년 후반에 당시 고딩이었던 필자도 학생신분을 속이고 퍽이나 생맥주를 마셨던 기억이 난다.

가맥은 가게맥주의 준말이다. 전주사람들은 풍류가 있어 술 한 잔에 예술을 논하는 사람들이다. 술을 자주 마시는 전주사람들에게 가맥은 얇은 주머니로도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삶의 휴식처이자 활력소가 되었다.

 

인프라 투자가 필요한 전주가맥

2015년 8월에 추진된 전주가맥축제는 매우 신선했으며, 술의 도시 전주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보여주는 축제였다.

혹자는 대구치맥축제의 아류가 아니냐는 말도 있지만 전주가맥의 역사는 1980년대에 그 뿌리가 닿을 만큼 역사성이 깊다. 또한 전주 곳곳에 포진한 가맥집들과 그에 얽힌 콘텐츠들은 제대로 발굴하고 다듬으면 전주가맥이라는 브랜드를 더욱 기름지게 할 것이다.

하지만 가맥을 문화관광콘텐츠로 육성하려는 인식이 없다보니 기초투자가 안되어 있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전주시는 막걸리에 막프로젝트라는 사업을 벌여 막걸리지도를 그리고 막걸리콘텐츠 조사사업을 시행했다.

막걸리지도를 통해 전주 부도심인 평화동이나 삼천동, 서신동까지 막걸리거리의 외연이 확장되었다.

또한 시청에 막걸리 활성화를 맡은 담당부서가 있어 다양한 활성화대책을 내놓고 있다.

그에 비해 전주가맥은 기초인프라 투자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다. 담당하는 소관부서도 없는 상태다.

이제 전주는 가맥이라는 아이템으로 술의 도시 전주의 위상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먼저 시청에 전주가맥을 문화관광콘텐츠로 육성하려는 담당부서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다양한 육성정책이 만들어진다.

전주가맥지도를 그리고 전주가맥에 대한 인문학적 조사를 벌여야 한다.

또한 가맥과 곁들이는 안주에 대한 외식산업적인 접근도 필요하다. 황태나 갑오징어 등 가맥집들의 대표안주와 마약소스를 소포장하여 상품화시키는 방안도 연구해야 한다. 이를 통해 전주가맥으로 지리적표시단체표장도 등록을 추진했으면 한다.

이러한 인프라가 잘 조성된다면 전주가맥축제는 그 정점에서 제대로 꽃 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술을 마시기 위해 여행을 오는 도시는 전주가 유일한 것 같다. 가맥이라는 자원을 잘 활용한다면 문화관광의 도시 전주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 글쓴이 유 상 우는

전라북도 막걸리 해설사 1호. 혹은 전라북도 酒당의 도당 위원장 쯤 된다. 한옥마을 인근의 동문거리에서 양조장과 술집(시)을 겸업하고 있으며, 2014년에는 전북의 막걸리 발전을 위해 막걸리해설사를 양성하려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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