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처분 극장

살처분 극장

 

권 녕 하

시인, 문화평론가

<한강문학>발행인

 

정유년 벽두부터 냉랭한 추위 속에서 닭 살 처분(殺處分)이 시작됐다. 설날을 앞두고는 계란 값 폭등에 미국산 하얀 달걀수입이 뉴스거리가 됐다. 정월 대보름을 앞두고는 구제역 파문에 이제 뭘 먹어야하나? 중부 내륙지방 충청북도 보은에서까지 양성으로 판정 났다. 만만한 술안주 거리가 없어져 매일 저녁 술시만 되면 뒤숭숭해진다.

 

최근 탄핵, 하야, 촛불집회에 맞대응하는 태극기 집회가 주말마다 도심을 점령한다. 뉴스 안 듣고 신문 안 보고 귀를 틀어막고 살려고 애를 쓴다. 그래봤자 주말 오후마다 도심을 술렁이게 하는 불온한 느낌은 꼭 전란(戰亂)에 휩쓸리기 직전의《카사블랑카》같다.

험프리 보가트의 냉정함과 잉그리드 버그만의 고뇌에 찬 선택의 순간! 마지막 탈출 직전의 짧은 이별의 순간에 펼쳐진 남녀 간의 사랑과 이성과 전쟁과 평화, 삶과 죽음과 희망과 절망과 미래와 현실 등 극단적인 이분법적 선택 앞에서 고뇌하는 인간상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보여주던 장면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이때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북아프리카 모로코의 대서양 연안에 있는 작은 도시 카사블랑카에서 벌어진 일이다. 패전상황에 몰린 프랑스령 모로코에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전쟁 상황과 그 소식에 따라 이합집산 하는 인간군상과 도박장과 암시장의 혼란상 등 그러나 카사블랑카는 영화일 뿐이다.

 

로또복권 구입 행렬이 뉴스에 나온다. 소비자 물가가 슬금슬금 올라가고 있다. 대권 주자들과 언론은 제 세상 만났다. 정치 뺀 언론은 어땠을까? 예년 같으면, 세시풍속의 아름다움과 전통과 정통성 보존, 미풍양속에 설날 귀성인파 대이동에 동장군의 누그러들지 않는 기세에 입춘 날 건양다경 입춘대길 춘첩(春帖)과 대보름날 쥐불놀이 등 사람 사는 세상의 온갖 소식을 앞 다투어 전해줬을 것이다. 이런 소박한 희망도 이분법적 사고방식일까.

 

2017년 2월 11일, 오늘내일하던 김정은이 결국 사거리 500km급 미사일을 동해상에 발사했다. 트럼프 정권은 자국의 안전과 한미동맹에 의거 선제공격 의도를 숨기지 않기 시작했다. 중국은 북한정권이 휘청거릴 때를 대비해 군단 급 병력이 대기상태에 있다. 러시아와 일본은 속내를 적극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가만있을 리가 없다. 가만있다니? 대한민국은 지금 전 세계인이 주목하는 재미있는 극장(劇場)인걸. 그것도 애드립이 허용된 1인 단막극 혹은 모노드라마처럼 코앞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매우 흥미진진한 이전투구 싸움질 판이다. 구경 중 싸움 구경이 최고다. 단, 이 상황이 바로 대한민국의 현실이라는 것이 비극이다.

 

툭하면 매년 살 처분으로 땜질해왔다. 상조회사도 안차려놓고 닥치면 파묻었다. 땅이나 준비해놓고 살 처분해야지 사람도 화장장 수목장 하는 판에 닭 파묻을 땅이 남아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가창오리는 매년 어김없이 찬바람만 불면 동토에서 날아오는데, 그때마다 또 번번이 닭을 살 처분이나 하고 말 것인가? 계란을 수입하고, 구제역은 결국 육류 수입으로 대처해야할 터이고, 병원균을 옮겨온 가창오리는 떵떵거리며 환경론자들의 보호를 받고 있는데, 광우병 주장하던 한 때의 ‘환경학자언론정치사회단체’들은 모두다 지금 어디 계신가? 카사블랑카에서처럼 인류의 고민을 한 몸에 모두 떠안고 탈출하셨나? 대한민국은 현재 살 처분(殺處分) 극장(劇場)이 돼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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