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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골군자와 무치부인의 에로스적 암투

무골군자와 무치부인의 에로스적 암투

–팜므파탈과 옴므파탈의 치열한 전투–

 

 

남태우(南台祐;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풍류와 음주 칼럼니스트)

 

육담과 외설의 이중주

 

육담(肉談)의 주 소재는 단연코 성(性/sex)이다. 그런데 육담에서 ‘성’은 신성한 것도, 추악한 것도 아니다. 그저 사람의 본능일 뿐이다. 본능이기에 이성이면 그냥 보고 싶고, 보면 제 것이건 남 것이건 만지고 싶고, 하고 싶은 욕망이 드는 것은 수컷이라면, 자연스러운 욕망이자 이치이다. 그러나 ‘성은 즐기는 것이다’라는 말은 육담의 세계에서는 금언이다. 남녀의 경우 적당한 성생활을 통해 음이 양을, 양이 음을 보충해줘야만 비로소 이상적인 건강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대 중국에서는 남녀 간의 성생활을 고상한 말로 방위(房幃)라고 했다. 요즘 중국에서는 방사(房事, sex)다. ‘방 방(房)’ 자와 ‘일 사(事)’ 자를 써서 ‘방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뜻이다. 방(房)은 방이나 침실을, 사(事)는 일을 뜻하여, ‘침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의미한다.

 

합궁(合宮)이나 방중지사(房中之事)와 같은 말로도 쓰인다. ‘방위(房幃)’는 한자 뜻 그대로 풀이하면 ‘방안의 휘장(커튼)’을 의미하며, 비유적으로는 ‘부부의 침실’이나 ‘부부 사이의 사적인 생활’을 뜻한다. 그래서 육담에는 윤리나 도덕은 부재한다. 남녀가 육체적으로 결합하는 행위를 뜻하며, ‘합궁(合宮), 입방(入房), 행방(行房), 합음양(合陰陽), 방중지사’ 등으로도 불린다.

시아버지의 ‘물건’을 며느리가 부끄럼 없이 말하고, 양반이 종년을, 마님이 하인을, 스님이나 목사가 여자를 유혹하고, 해도 좋고, 못해도 좋고, 설사하다가 남한테 들켜도 창피도 없고 후회나 반성도 없다. 이렇게 그 내용이 부도덕해도 권선징악이 없다. 육담의 기능 중 최고의 장점은 실없이 맘껏 웃는 데 있다. 말하는 사람도 웃기려고 말하고, 듣는 사람도 웃으려고 듣는다. 남녀노소가 육담의 현장에서는 체면 불고하고 웃음으로 보한과 망우한다. 아무리 진한 육담이라도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웃기만 할 뿐 그것으로 흥분하거나 미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육담은 순수한 소화(笑話)일 뿐이지 결코 ‘외설(猥褻)’이 아니다.

 

나이가 서로 비슷비슷한 숙질(叔姪)간에 함께 길을 가다가 어느 객사에 묵게 되었는데, 주인 부처(夫妻)가 얇은 벽을 격한 방에서 밤이 깊은 뒤에 밤새도록 갖가지 재주를 다하며, 일을 시작하는데, 조카는 마침내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 소리를 듣고 손으로 그 숙을 잡아 흔들어 본즉, 숙이 깊은 잠에 빠져 깨지 못하는지라, 이튿날, 그 숙에게, “지난밤, 이러 이러한 재미있는 현상을 보았습니다.” 하니, “어째서 나를 깨워 그것을 함께 구경케 하지 않았느냐?.”

“그럴 리 있습니까? 암만 흔들어도 아저씨께서 통이 일어 나셔야지요.” 그 아재비가 제기랄 하고 탄식하며, “오늘 하루 더 묵으며, 우리 그 짓 하는 것을 좀 보고 가자. 오늘 저녁에 내 명심하고 자지 않고 기다리리라.”하고 병을 핑계 삼아 하루 더 묵게 되었다. 그날 밤도 깊었으나, 주인의 음사(淫事)가 마침내 동정이 없는지라. 숙은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더니, 깊은 잠이 들기 전에 벽을 격한 방에서 주인이 처의 옷을 벗기는 소리가 부스럭거리거늘, 그 조카가 아재비를 흔든즉 숙이 비몽사몽 간에, 크게 기뻐하며 큰소리로, “주인 놈이 그 일을 정말 시작했느냐?” 하니, 주인이 듣고 놀라 음심(淫心)이 위축하여 다시 하지 못하는지라. 이틀이나 헛되이 여관이 머물러 있다가 마침내 주인 놈의 행락(行樂) 하는 광경을 보지 못하고 헛되이 밥값만 치렀단다.

 

육담(肉談)과 외설(猥褻)은 모두 성적인 내용을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으나, 그 성격과 목적에서 차이가 있다. 육담은 주로 조선시대 음담패설을 일컫는 말로, 살(肉)과 살이 부딪히는 이야기, 욕정적인 이야기를 뜻한다. 성적 욕망과 행위 역량을 남성성의 규범적 요소로 인식하는 전제하에, 이를 넘치거나 모자라게 표현하는 이야기 유형이다. 외설은 사람의 성욕을 함부로 자극하는 난잡한 것을 의미한다. 예술과 달리 성적 욕망을 단순히 자극하기 위한 목적이 강하다.

그러므로 육담은 주로 조선시대 민간 설화나 이야기꾼들에 의해 구전되거나 기록된 민담, 고금소총 같은 형식(외설담)으로 나타난다. 반면, 외설은 현대적 의미에서 성적 자극을 노골적으로 다루는 예술 외적 표현 전반을 포괄한다. 육담은 단순히 음란한 이야기를 넘어 인습에 대한 반항, 가공의 이야기를 통한 해학이나 만용 적인 탈출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외설은 성적 자극에 집중하여 음란함을 유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외설(猥褻)’은 속된 언어와 이미지가 떠오를 수 있지만, 이 단어의 이면에는 어떤 의미와 배경이 감추어져 있을까? 개(犬)가 사람을 보고 두려워(畏) 마구 짖는 것이 ‘외(猥)’다. 기분이 좋을 리 없다. 그래서 기분이 ‘더럽다’는 뜻이며, 외람(猥濫)은 ‘자신의 분수를 더럽힌 것’을 뜻한다.

한편 ‘설(褻)’은 ‘衣’자를 가지고 있으므로, 옷과 관계되는 글자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하나는 평상복이고, 또 하나는 속옷이다. 평상복이든 속옷이든 옷은 옷이다. 따라서 ‘외설’의 본디 뜻은 ‘옷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사전을 검색해 보면 ‘남녀 간의 추잡한 행위’라고 해설되어 있다. 그래서 외설물(猥褻物), 외설죄(猥褻罪)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은 별 것 아니다. 잠시 옷을 더럽혔을 뿐이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듯 우리 조상들은 의관(衣冠)을 무척 중시했다.

‘옷=인격‧신분’을 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에도 엄연한 패션이 있었다. 공자 당시 군자의 패션으로는 어떠한 경우에도 감청색과 분홍색 옷을 입어서는 안 되었다. 특히 평상복이나 속옷(褻)을 그런 식으로 입는 것은 금기였다. 물론 덥다고 속이 비치는 옷을 입어서도 안 되며, 목욕재계 후에는 반드시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공자가 이처럼 옷을 강조한 것도 알고 보면 ‘옷=인격’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외설은 외심(猥心/마음을 더럽힘)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외설죄는 외심죄(猥心罪)다. 음란한 행위나 물건을 가지고 ‘마음’을 더럽히는 것이 외설인 것이다.

 

육담은 성과 관계없이 진화한다. 더구나 육담은 하나의 유기체로 꾸준히 변이되고, 또 창작된다. 이렇게 변이되고 창작된 우리의 육담은 성의 진실만이 아니라, 우리의 문화적 특성이 내포된 대중적 민속문화이기도 하다. 더욱이 오늘날 사회적으로 남녀가 동등해지고 성이 비교적 자유스러워지면서 다양한 육담이 발달된 매스미디어를 통하여 제한 없이 전파되고 있어도 그 내용이 음탕하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연구의 대상에서 소외되어 왔다.

그러나 육담은 연구되어야 한다. 민속학에서 구비전승되는 민담의 하나로만 연구될 것이 아니라 앞으로는 민족문화로서 폭넓은 연구가 필요하다. 그리고 육담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연구자들이 육담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탈피하여야 한다. 성 담론의 외설에서 주체가 되는 두 단어의 뜻을 우선 살펴보자.

 

씹:사전에 찾아보면‘성숙한 여자의 Y지’, 또는‘남녀의 성교’라고 나와 있다. 성교라는 의미는 잘 아실 테니 각설하고 여기선‘씹’의 어원에 대해서만 풀이하고자 한다. 씹 즉 어른의 보지는 어떤 역할을 하는 곳인가? 그곳은 남자의 정액을 받아들이어 아이를 만드는 초입의 구실을 하는 것이다. 즉, 남자의 씨를 받아들이는 입구인 것이다. 씨를 받아들이는 입구, 결국‘씹’은‘씨’와‘입’이 합쳐진 순수 우리말 복합어였던 것이다. 두 단어를 붙여서 발음해 보라.‘씨입’빠르게 발음하게 되면 씹’이 되는 것이다.

좆:좆’은 사전적인 의미로는‘성숙한 남자의 X지’라고 나와 있다.‘좆’과‘X지’의 어원은‘잦’이다. 그러므로 두 단어는 단지 모음의 차이일 뿐이며 같은 뜻의 단어이다. 그런데‘ㅈ’은 ‘ㄷ’에서 변한 자음이다. 따라서‘좆’과‘잦’은‘돋’과‘닫’이 조어가 된다. 일본 유구어에서는 남자의 X지를‘다니(TANI)’라고 하는데, 어근‘단(TAN)’은‘닫(TAT)’이 조어가 된다. 우리나라 말의‘닫’과 완전히 일치된다. 만주어에‘다림비(TARIMBI/씨를 뿌리다)’라는 말이 있는데, 어근 ‘달’이‘씨(種)’의 뜻을 지니고 있으며, 여기에서의 어근‘달’은‘닫’이 조어가 된다. 결국 ‘좆’은 ‘씨(種)’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Y지:Y지’의 어원은‘볻’이다.‘볻’은‘뿌리’나‘씨(種)’의 뜻이 있는 고어인데, 동북아 일대에서 아직도 변형되어 사용되고 있는 말이다. 이‘볻’은 다시‘볼’이고, 여기에 접미사‘옴’이 붙어‘보롬’이 되며, 이것은 다시‘ㄹ’이 떨어져‘보옴’이 된다. 보옴은 지금 우리가 현대어에서 사용되고 있는‘봄’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본다면‘Y지’와‘봄’은 결국 같은 말인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만물의 뿌리가 내리고 모든 것이 기지개를 켜는‘향기로운 봄’,‘향기로운 Y지’인 것이다.

 

육담은 주로 성(性)에 관한 소재로 꾸며진 민담이기에 ‘외설담’이라고도 한다. 성에 관련된 것을 소재로 한 이야기가 민중 속에 퍼져 있으면서도 이를 저속하게 여기거나 공개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관계로 육담은 친근한 사람이 모인 경우에만 이야기되고, 이것의 기록물은 특수인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 중국 연변 조선족들은 육담을 ‘고기얘기’ 또는 ‘쌍담’이라 한다. 이때의 고기는 ‘육(肉)’을 유머러스하게 번역한 것인데, 고기는 다름 아닌 ‘몸’을 뜻한다. 문학사를 살펴볼 때, 상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성에 대한 표현이 노골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생활 일상에서 통용되고 있는 ‘육담’이란 말은 흔히 허물없는 사람끼리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부담 없이 주고받는, 성(性)에 관련된 ‘비속한’ 이야기나 말을 이른다. 남녀간의 애정을 성의 감정적 측면이라 한다면, 성의 감각적 측면은 에로티시즘이라 하겠는데, 육담의 세계는 성의 감각적 측면인 에로티시즘에 가깝다. 성에 대한 감정적 측면(애정)은 곧잘 미화하고, 고상하게 표현하면서도,

그 감각적 측면(에로티시즘)은 외설이나 부도덕한 것으로 금기시한, 꽤 오랜 문화를 가지고 있다. 애정에 관한 언표(言表)나 형상화는 미적 평가를 받는 반면, 에로티시즘에 관한 언표나 형상화는 비속하거나 추잡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설사 그 언표나 조사(措辭/문장에서 말을 다루어 쓰는 일) 자체가 품위를 과히 잃지 않았더라도 내용의 에로티시즘 때문에 비속한 말이나 표현으로 취급되어 버렸던 것이다.

인습적 의미에서 도덕적인 사회에서는 성에 대한 감각적 행위와 또 그것을 표현하는 일 모두가 금기에 속했다. 정상적인 부부관계일지라도 성의 감각적 측면의 심취나 성의 감각적 측면의 노출은 여전히 금계(禁戒)였다. 성의 기능을 애정이나 쾌락으로서가 아니라 번식에 국한해야 한다는, 경직된 일방적 도그마가 지배하던 전통사회에서는 그와 같은 금기가 당연시되었다. 지나친 에로티시즘이 성을 병적인 기교로 몰아가는 것도 문제이나, 성의 기능을 번식의 목적에 한정시키는 것도 문제이다. 인간 문화를 사회적 생산에만 한정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성의 양 측면인, 정신적 성향(애정)과 동물적 성향(에로티시즘)은 결코 서로 용납 못 할, 대립적인 관계는 아니다. 어느 편도 다른 편과 결합하지 않고서는 완전히 성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선의 남녀관계는 자유 안에서 두려움 없이 육체와 정신이 동등하게 합성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애정이면서 쾌락이기도 한 성은 그로 인하여 완전한 생식행위이기도 한 것이다.

절벽 같은 조선 사회에서, 성에 관한 사회적 금기를 파기하는 문화 현상의 하나로서 육담이 시사하는 바는 작지 않다. 육담은 사회 통념인 성에 관한 금기를 파기함으로써 사회 성원들로 하여금 성에 관하여 다소간의 심리적 해방감을 경험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육담을 통해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체험(금단의 열매를 훔쳐 먹는)을 하며, 안에 있어서 드러나지 않았던, 또 다른 나, 혹은 ‘참 나’의 모습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개체의 에로티시즘의 표현 형태는 그의 인격을 형성하는, 다른 어떤 근본적 특성보다 본질적이며, 불가결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육담의 일반적 형식은 이야기형 설화이고, 수수께끼 형 육담도 많이 유통되고 있다. 수수께끼 형 육담은 화자가 청자에게 질문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이는 서사적 진행에 묘미를 더하는 문학적 장치일 뿐이다. 구비문학으로서 연행의 묘미를 실감케 하기 위해서는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해나가기보다는 청자를 이야기 속에 끌어들이는 것이 효과적이다. 수수께끼 형은 그런 구연상의 기법이라 하겠다. 수수께끼형과는 취향이 다른 문답형 육담이 있다. 예를 들면, 정철(鄭澈)과 진옥(眞玉)이 주고받은 문답형 시조가 이에 속한다. 다음으로 흔한 형식이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를 이용한 언어유희형(言語遊戱型) 육담이다. 위의 시조도 ‘진옥’과 ‘정철’이라는 동음이의어를 구사한 언어유희형으로 볼 수 있고, 다음 같은 현대의 예도 흔히 보는 바다.

육담이 다루고 있는 성은 본질적인 인간의 성임에도 불구하고, 기성사회가 이를 규제하고 금기시하고 있는 데 대하여 이를 음양으로 파기하는 내용이라 하겠다.

첫째가 성 그 자체를 쾌락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생식 외의 성을 무시한 전통 의식에 상반된다. 예컨대, 중이 길에서 여인을 만났다. 욕심이 움직였으나 뾰족한 수가 없었다. 여인의 뒤를 쫓던 중은 ‘네 어찌 방귀를 뀌느냐?’ 하고, 여인을 꾸짖었다. 여인은 발끈하여 중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중이 재차 꾸짖었으나 여인은 수그러들지 않고 대드는 것이었다.

둘째, 성을 인생의 소중한 가치로 나타내고 있다. 어떤 의미로는 지상(至上)의 가치로 그렸다는 인상을 준다.

셋째, 성에 무지한 이를 일깨우는 내용의 이야기도 육담의 한 갈래로 있다. 이는 자칫 속된 표현이 될 수도 있는 성적 내용을 골계적(滑稽的)으로 재미있게 전달함으로써 청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성적 관심과 흥미를 갖도록 유도하는 계몽의 구실도 한다. 육담은 단순히 흥미만을 목적으로 삼았던 것은 아니다. 성을 가르치는 정당한 교육의 기회가 없었던 전통적 조혼사회에서 남자에게 성을 깨우쳐 알게 하는 주요한 구실도 했다.

 

육담은 성에 관한, 있을 수 없는 허구의 이야기, 있었던 사실의 이야기, 있을 수 있는 가상(假想)의 이야기들을 포괄한다. 이들 이야기의 내용은 주로 남녀간의 성적 관계에 국한되며, 선악의 대립은 관심사가 아니며, 기지(機智)와 지략(智略)은 있어도, 성과 무관한 갈등이나 고민은 없다.

성적 계몽의 기능은 교육적, 교훈적이지 않는 한계에서 이루어진다. 육담은 성의 진실을 쾌락에 두고 있어, 주인공들이 도덕적 고민이나 윤리적 갈등 없이 부도덕한 성적 행위를 하되 권선징악이 따르지 않는다. 육담 속의 인물에게서 보는 성에 대한 집착 심, 과도한 반윤리적 성향은 성을 억누르고 금기시한 사회의 경직성에서 불가피한 반작용이기도 하다. 남녀간에 있어야 할, 자연스러운 애정의 부재, 그 당연한 결과로서 애정과 성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수 없었던 데서 오는 불만이 성적 욕망을 동물적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정상적으로 성적 욕구불만을 해소할 길이 없는 상황에서 혼외정사나 겁간(劫姦)과 같은 비정상적 방법으로 욕구를 충족시켰던 때문에 육담, 특히 조선시대의 문헌 육담에서는 그와 같은 세계가 곧잘 반영되고, 소재가 되었다. 문헌 육담은 중세적 모순의 산물이라 할 왜곡된 성 의식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나, 한편 성적 욕구불만을 중화하고 해소하는 배출구 구실을 해왔고, 또 하고 있다. 육담의 주인공들은 관습이나 윤리의 탈을 벗어 던진 ‘성적(性的) 인간상’이라는 차원에서 두루 평등한 인간들이다.

육담이 일련의 문헌설화로 유행한 시대는 성리학 일변도의 유교주의가 지배하던 조선시대로서, 삼강오륜(三綱五倫) 외의 다른 어떤 교학(敎學)이나 사상도 외도(外道)로 배척되었다. 이처럼 경직된 사회의 저변에서 ‘육담’ 같은 이색(異色)의 문화가 싹터 꽃피었던 것은 역설적이기는 하나 경직된 사회일수록 육담이 내포한 이질의 의식(구속 모르는 자유분방)이 저변에서 절실히 요청되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기성의 문화에 대하여 그 언표와 이야기는 세련되지 못하고, 내용 또한 조잡하고 저속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금기를 깨고 감히 말하고 이야기하는, 그 내적 계기가 된 자유 추구의 정신은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가문 계승이나 종족 번식을 떠나서는 달리 성관계를 생각할 수 없었던 기성의 문화에 대하여, 쾌락의 원리를 끌어들인 ‘육담’은 비록 그 제약적 조건(사회적으로 외설, 표현면의 저속성이 시빗거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에 관한 복안적(複眼的) 시야를 열어 놓음으로써 엄연한 본능적 인간성의 뿌리마저 인위적으로 무화(無化)시켜 온, 우리 사회의 오랜 인습의 벽을 허무는 데 도움이 되었다. 자유 안에서 두려움 없이 육체와 정신이 동등하게 합성하여, 애정이면서 쾌락이기도 한 성이 완전한 생식행위가 되는, 최선의 남녀관계를 꿈꾸는 문화의 선구일 수도 있다. 육담과 외설이 뒤섞어 있는 음담패설을 하나 살펴보자.

<다음 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