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철 칼럼
순정, 용기가 있는 술
임재철 칼럼니스트
인생 뭐 있어? 그저 열심히 살면서 뜻이 맞는 사람과 따뜻한 한 끼 식사, 그리고 술 한 잔을 들이키면 그 뿐이지! 필자를 비롯한 주위에서 자주 하는 말이다.
명정(酩酊). 술 취할 명(酩)에 술 취할 정(酊)이니, 술내가 진동하는 낱말이다. 술 취한 사람의 입에서 나는 냄새를 우리말로 ‘문뱃내’라고 하는데 문뱃내가 코를 찌르는, 순우리말로 ‘고주망태’가 어울리는 단어일 것이다.
고주망태는 술에 몹시 취해서 정신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 또는 그런 사람을, 모주망태는 늘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하염없이 마시는 사람을 가리킨다.
고주망태로 살아온 자신의 삶을 수필집 ‘명정 40년’으로 묶어낸 문학가도 있었다. 바로 수주(樹州) 변영로다. 1897년 태어난 천하의 술꾼, 주선, 모주망태로 유명하다. 오상순, 염상섭 등 옛 문인들은 음풍농월 속에서 술을 즐긴 일화가 많아 지금도 회자되는 게 많다. ‘명정 40년’은 애주가들의 눈으로 보면 때론 배꼽 잡고 웃고, 때론 미소 지으며 엔도르핀을 생산할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술에 흠뻑 젖어 길에서 잠들거나 다쳐서 귀가하기 일쑤인 그를 바라보는 가족의 아픔은 어떠했을까.
필자 역시 본격적인 사회생활 이후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술에 취해서 살았다. 술기운을 감추기 위해 술을 마시고 전철을 탈 때면 구석자리에서 코를 박고 숨죽인 채 있었을 정도로 술을 사랑했다. 또한 잠이 들어 어느 전철 노선을 두 바퀴나 돌아 겨우 집에 들어갔던 적도 있었고, 주섬주섬 산 빵이나 물건들을 차에 실어 보낸 것도 부지기수다. 그러고는 다음 날 결국에는 실패할 금주를 선언했던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지금 수주처럼 술을 마시면, 병원이나 파출소에 가겠지만, 술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수백 배나 많아질 정도로 세상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때, 그 낭만과 멋이 부러운 것 또한 사실이다. 아직 감성이 살아있는 필자기에. 술, 적당히 멋있게 즐길 수 있으면 최고의 낙(樂)일진데….
또 다른 술꾼 지훈 조동탁은 술을 마실 때의 주격(酒格)을 중시했다고 한다. 조지훈은 술을 마시는 데에도 엄연히 단(段)이 있다고 갈음했다. 즉 ‘주도 18단계’이다. 우리 각자는 몇 단에 속 할까.
◇부주(不酒)=술을 아주 못 먹진 않으나 안 먹는 사람-9급 ◇외주(畏酒)=술을 마시긴 마시나 술을 겁내는 사람-8급 ◇민주(憫酒)=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으나 취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기는 사람-7급 ◇은주(隱酒)=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고 취할 줄도 알지만 돈이 아쉬워서 혼자 숨어 마시는 사람-6급 ◇상주(商酒)=마실 줄 알고 좋아도 하면서 무슨 잇속이 있을 때만 술을 내는 사람-5급 ◇색주(色酒)=성생활을 위하여 술을 마시는 사람-4급◇
수주(睡酒)=잠이 안와서 술을 먹는 사람-3급 ◇반주(飯酒)=밥맛을 돕기 위해서 마시는 사람-2급 ◇학주(學酒)=술의 진경(眞境)을 배우는 사람(酒卒)-1급 애주(愛酒)=술의 취미를 맛보는 사람-초단 기주(嗜酒)=술의 진미에 반한 사람(酒客)-2단 탐주(耽酒)=술의 진경(眞境)을 체득한 사람(酒境)-3단 폭주(暴酒)=주도(酒道)를 수련(修練)하는 사람-4단 장주(長酒)=주도 삼매(三昧)에 든 사람(酒仙)-5단 석주(惜酒)=술을 아끼고 인정을 아끼는 사람(酒賢)-6단 낙주(樂酒)=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사람(酒聖)-7단 관주(觀酒)=술을 보고 즐거워하되 이미 마실 수는 없는 사람(酒宗)-8단 폐주(廢酒)=술로 말미암아 다른 술 세상으로 떠나게 된 사람-9단
역사적으로 전쟁을 이기고 영토를 넓힌 남자들을 영웅으로 취급했다. 알렉산더, 시저, 조조, 징기스칸, 나폴레옹 등등. 물론 지식이 높은 것도 대접을 받지만 회사에서 승진하고 살아남으려면 모든 처세술을 행하며 회사 및 사회라는 전쟁터에서 승리를 해야 한다. 사회는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강한 남자를 원하지만 그 승리자들은 동료를 다치게 하고 넘어서면서 그 반대편에 있는 자들을 많이 아프게 하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게 한다. 이때 가슴시린이들은 술 한 잔 나눌 수 있는 벗을 찾을 것이다.
그래서 술은 우리의 삶, 생활 속의 아름다움과 위대함, 순정의 사랑과 경탄을 화폭에 담아내기도 하고 상처받고 용기를 잃은 자에게는 일상의 위로와 깨우침을 전해주는 메신저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