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녕하 칼럼
음식은 傷하기 직전에 제일 맛있다
신라 성덕왕(聖德王) 때는 당(唐)과의 국제관계가 원만하던 때이다. 막상 당나라는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왕을 길게는 5년 짧게는 1년, 20여 년간 10여명의 왕을 갈아치운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의 철권정치를 펼치던 때였다.
성덕왕은 원년(702) 9월, 대사령을 내리고 문무관(文武官)에게 관작을 1급씩 올려주고 주군(州郡)의 조세를 1년간 면제해준다. 2년 봄 정월에는 왕이 친히 신궁에 제사지내고 사신을 당에 보내어 토산물을 바친다. 가을 7월에는 영묘사에 화재가 일어나고 서울(경주)에 큰물이 져서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많았다. 일본국에서는 사신이 왔는데 204명이나 왔다. 3년 봄도 4년 봄에도 국내·외적으로 다사다난한 가운데 당나라와의 관계는 빈번할 정도로 교류하며 자주 조공하였다. 여름 5월에 가뭄이 들어, 가을 8월에 노인(老人)에게 주식(酒食)을 하사하였고 9월에 교서를 내려 살생을 금지시켰다. 그 와중에서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겨울 10월 동쪽 주와 군이 굶주려 유리 분산하는 자가 많으므로 곡식을 나누어주었다.(《삼국사기》卷8, 신라본기 제8)
위 기사에서 보듯 당과의 관계는 매년 조공을 지극정성으로 할 정도로 내밀한 국제관계였음을 알 수 있는데, 그런 중에도 신라 국내 사정이 편안하지 않은 가운데서도 ‘노인에게 주식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 기록’이었는지《삼국사기》에까지 남아있다.
서기 627년(진평왕 44년),《삼국사기》권 제48, 열전列傳 제8, ‘검군(劍君)’ 기록에는 ‘여러 사인들이 술을 마련하여 치사하고 사죄하면서 몰래 약을 섞어 먹였다. 검군은 알면서도 억지로 마시고 죽었다’(諸舍人置酒謝之 密以藥置食 劍君知而强食乃死) 군자 왈 “검군은 죽지 않아야 할 데에 죽었다. 이야말로 태산(泰山)같은 무게를 홍모(鴻毛)처럼 가볍게 여겼다” 하였다.(김부식의 기록)
검군에 관한 위의 삼국사기 기록은, 가을 8월에 서리가 내려 모든 곡물이 죽으니 이듬해 봄, 여름에 크게 기근이 들었다. 백성들은 자식을 팔아서 먹는 형편이었다. 이 때문에 궁중의 여러 사인(舍人)들이 공모하여 창예창(唱翳倉) 곡식을 도둑질하여 나누는데, 유독 검군이 받지 않으므로 여러 사인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이 모두 받는데 그대만 유독 받지 않으니 어쩐 까닭이요. 적어서 그런다면 더 주겠소” 하였다. 검군은 웃으며 “나는 근랑(近郞)의 무리로 이름이 적히고, 풍월(風月)의 문정(門庭)에서 행실을 닦았소. 진실로 의(義)에 맞지 않는 것이라면 비록 천금의 이익이라도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하오” 라고 하였다. 이때 이찬(伊湌) 대일(大日)의 아들이 화랑이 되어 이름을 근랑(近郞)이라 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검군이 외출하여 근랑의 집을 찾아갔다. (그러자)사인들이 비밀히 의논하기를 “이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탄로가 나고 만다” 하여 검군을 불렀다. 검군은 그들이 자기를 죽이려 하는 것을 알고 근랑에게 “오늘 이후에는 다시 못 보겠습니다” 하였다. 근랑이 그 이유를 물었으나 검군은 말하지 아니하므로 재삼 물으니 대강 그 이유를 말하였다. 근랑은 “그렇다면 왜 관사(官司)에 말하지 않는가?” 하자 검군은 “자기의 죽음을 두려워하여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받게 하는 것은 인정상 차마 못할 일입니다” 하였다. 또 근랑은 “그렇다면 어찌 달아나지도 않는가?” 하자 검군은 “저쪽이 굽고 나는 곧은데 달아난다면 도리어 장부가 아니지 않습니까?” 하고 드디어 사인들에게 갔다.
‘모든 음식은 상하기 직전에 제일 맛있다’는 경구(警句)는 음식 뿐 만 아니라 사람 사는 세상에서도 잘 통하는 말이다. 남녀 간의 애정, 사내들의 의리, 조직의 문화를 내세우며 자유정신과 참(眞)이 겁박당할 때 제일 화려하고 맛있게(!) 느껴진다.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예술, 전통, 역사 특히 권력이 부패하기 시작할 때 가장 잘 어울리는 경구이기도 하다. 나쁜 권력일수록 사인(舍人)들과 같은 논리를 들이대며 ‘검군’같은 희생자를 생산(?)해 내는데 매우 능숙하다. 그런 반면 ‘노인(老人)에게 주식(酒食)을 하사’한 것처럼 정직한 권력은 ‘진실로 의(義)’를 살피며 민생을 보살핀다.
술은 예나 지금이나 귀한 음식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신라시대처럼 선(善)과 악(惡)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술이 빚어지는 과정 그 자체가 원재료를 상(傷)하게 해서 빚어지기에, 태생적인 술(酒)의 팔자(?)일지도 모른다.
권녕하
시인, 문화평론가 <한강문학>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