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台祐 교수의 특별기고
세상에서 가장 에로틱한 수밀도형 술잔 이야기(17)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下)
그러나 그 결정이 결국 후에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고 왕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왕실은 재판을 통해 왕비의 누명을 벗어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재판을 담당할 파리 고등법원은 귀족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부패로 가득찬 곳이었다. 그들은 최고의 귀족 출신인 로한 추기경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린다. 무죄방면을 한 것이다. 라 모트 백작부인은 어깨에 범법자의 표시인 V가 찍혀 영국으로 추방되는 것이 다였다.
로한 추기경이 무죄방면 되자 사람들의 의혹은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쏠린다. 대부분이 그녀가 음모를 꾸몄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머지 다이아몬드의 행방은 재판 중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사실 루이 16세와 앙투아네트 그리고 왕실은 이 사건을 재판에 넘기지 않고도 처리할 수 있었다. 왕실의 권한 중에 ‘봉인장(Lettre de cachet)’이라는 것이 있었다. 재판 없이 투옥, 유폐, 국외추방의 권한이다. 그런데 루이 16세는 피고의 권한을 최대한 살리는 공개재판에 회부하여 확실히 왕비의 누명을 풀어주고자 했던 것이다. 재판정은 왕실, 특히 앙투아네트를 비난함으로써 그들이 부패를 숨기고자 한 것이다. 결국 앙투아네트는 길로틴의 칼날 아래에 사라져 갔다.
그녀가 공개재판의 부당성에 대해 친한 사이였던 폴리냑 공작부인(Duchesse de Polignac)에게 보낸 편지에 그녀의 심정이 절절히 묻어난다. 역사의 아이러니고 미스터리이다. “사랑하는 폴리냑, 내게 와서 함께 울어주세요. 당신의 친구를 위로해주세요. 방금 나온 판결은 지독한 모욕입니다. 나는 고통과 절망의 눈물로 뒤범벅되어 있습니다. 사악한 사람들이 내 영혼을 구겨버릴 온갖 수단을 찾으려고 애쓰는 듯 한 이때에 우리는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어요. 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요. 그러나 나는 언제나 착하게 살려고 노력했고, 앞으로 세 배나 더 착해져서 악한 사람들을 이겨낼 것 입니다. 그들은 나를 괴롭힐 수는 있겠지만 내가 복수로 나서도록 할 수는 없을 거예요.” 앙투아네트에게 마음에서 우러나는 애도를 드리고 싶은 대목이다.
앙투아네트가 비록 철이 없기는 해도 이처럼 일방적으로 매도당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프랑스는 영국을 방해하기 위해 미국의 독립을 지원하는 바람에 심각한 재정 위기에 빠져있었다. 그런데도 왕비가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자 사람들은 분노의 상징적 대상으로 왕비를 골랐다. 사회적 악역이 필요했던 것이다. 오스트리아에 대한 공포심도 오스트리아 출신 왕비에 대한 비방을 부추겼다. 왕비가 왕에게 막강한 영향을 행사하면서 남성의 영역을 여성화했다는 비난도 이어졌다. 가장 심각했던 것은 왕비의 성생활에 대한 집요한 공격이었다.
당시 작가들이 부르봉 왕실을 약화시키기 위해 여성, 외국인이란 편견을 이용해 왕비를 중상하는 포르노물을 만들어 배포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음핵이 비대한 남녀추니이며, 시동생 그리고 심지어 자기 아들과도 같이 잤다는 근친상간 비방까지 나왔다. 서릿발 같았던 절대왕정의 권위가 어느새 허물어지고 있던 것도 왕실에 대한 이런 희화화와 비웃음을 부채질했다. 이런 와중에 벌어진 목걸이 사건이 프랑스 사람들의 집단 증오심에 불을 지른 것이다.
그러면 루이 16세 왕정을 무너뜨린 라 모트 백작부인이란 사람은 누구인가? 고급 사기꾼(con artist)이다. 원래 이름은 ‘잔느 드 생-레미 드 발루아(Jeanne de Saint-Remy de Valois)’이다. 간단히 ‘잔느 드 발루아’, 또는 ‘잔느’라고도 부른다. ‘드 발루아(de Valois)’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을 보면 유명한 발루아 왕실가문의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잔느 자신도 자기가 왕족의 후손임을 강조하고 다녔다. 잔느의 아버지는 프랑스 국왕이었던 앙리 2세와 잠자리를 같이 한 어떤 창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앙리 드 생-레미(Henri de Saint-Remy, 1557-1621)의 후손이라고 한다. 잔느의 어머니는 전직이 창녀였다.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잔느도 닥치는 대로 뭇 남자들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고 한다. 나중에 잔느는 드 라모트(de Lamotte) 백작이라는 사람과 결혼했기 때문에 ‘라 모트 백작부인(La Motte)’이라는 호칭을 가지게 되었다. 라모트 백작이라는 사람도 역시 사기성이 농후한 인물이었다. 잔느는 라 모트 백작과 결혼한 지 얼마 후 별거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혼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작부인이라는 호칭은 유지하였다. 잔느 드 발루아는 파리에서 국왕이 주선해준 연금으로 근근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재산과 명예에 대한 강한 욕망을 이기지 못하여 세기적인 사기극을 벌이게 되었다. 사기극에는 전남편인 라 모트 백작도 한통속이 되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사기극의 상대방이 다름 아닌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였으니 사기극 치고는 대담하기가 이를 데 없다.
수 십 년이 지나도 사랑받고 있는 고전 <베르사이유의 장미(ベルサイユのばら)>에서도 나온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물론 사건의 결말은 작가의 오리지널로 끝났지만…….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에서도 중요한 에피소드로 나온다. 모리스 르블랑의 초기작 <여왕의 목걸이>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으며, <어페어 오브 더 넥클리스(The Affair of the Necklace. 2001년 작)>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힐러리 스왱크, 조너선 프라이스, 사이먼 베이커, 에이드리언 브로디 출연, 대체 각본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영화가 절대적으로 잔느의 편을 들고 있다. 그래봤자 사기 친 게 정당화는 안 될 텐데……. 그래서인지 몰라도 각본을 쓴 존 스윗이란 사람은 이 영화 뒤로 10년이 넘도록 영화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은 18세기 초,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시절에 파리에서 일어난 희대의 사기극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보통 사기사건이 아니라 프랑스의 왕정을 무너트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개인적으로는 프랑스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열병에 걸린 것처럼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하여 증오심을 불태우게 만든 스캔들이었다. 오죽하면 나폴레옹도 “왕비(마리 앙투아네트)의 죽음은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으로부터 비롯되었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이 사건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후대 역사학자들도 사기극의 주역인 라 모트(la Motte) 백작부인이 남긴 비망록이 결국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목숨을 재촉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군주제의 몰락을 가져오게 한 가장 두드러진 요인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역사학자들은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희생양으로 만든 잔인한 사건이라는 점도 언급했다. 실제로 잔느(Jeanne)라고도 하는 라 모트 백작부인이 남긴 비망록은 이미 불이 붙어 있던 프랑스 시민들의 왕실에 대한 불만에 부채질을 하였고 이로써 결국은 프랑스 혁명이라는 대화재를 일으키게 하였다. 사건의 이야기는 복잡하고 길다. 그리고 치사하기도 하고 야비하기도 하다. 사기극의 주역인 라 모트 백작부인이 썼다는 비망록도 여러 버전이 나와 있어서 어느 것이 가장 정확한 것인지 모른다. 사건의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와 원래의 스토리가 많이 변색되었다. 최근 제작된 할리우드 영화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은 라 모트 백작부인의 비망록을 가장 근접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의 주인공은 라 모트 백작부인이란 사기꾼이었다. 이 가짜 백작부인은 상류층 생활을 유지하느라 엄청난 빚을 지자 어처구니없는 사기극을 계획했다. 그는 자신을 후원해주던 로앙 추기경이 총리대신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그의 출세욕을 이용하기로 했다. 로앙 추기경은 총리 대신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미워하는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환심을 사는 것이 꼭 필요했기 때문에 왕비와의 ‘선’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재판은 국왕과 왕비가 원하는 방향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오히려 엉뚱한 효과를 초래하였다. 왕비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은 부정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누가 뭐라고 해도 왕비에게 불리하였다. 왕비의 명예는 파괴되었다. 추기경은 죄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하지만 추기경의 지위를 박탈당했다. 국왕은 그를 곧 추방하였다. 잔느의 기둥서방 빌레트는 문서위조죄로 추방당했다. 창녀 니콜 돌리비아는 무죄 석방되었다. 왕비를 모욕하는 행동을 했는데도 무죄 석방되었다. 자칭 성자라고 하는 이탈리아의 여행가이자 사기꾼(charlatan) 알레산드로 디 칼리오스트로(Alessandro di Cagliostro, 1743~1795) 백작은 프랑스에서 추방당했다. 잔느는 유죄가 확정되어 채찍형과 함께 이마에 죄인이라는 낙인을 찍고 정신병자 수용소로도 사용되는 살페트리에르(Salpetriere)에 수감되었다. 백성들은 잔느를 동정하였다. 반앙투아네트 분자들이 잔느를 수용소에서 탈출시켰다. 잔느는 런던으로 도피하였다. 런던에서 그는 비망록(momoirs)을 발간하였다. 그는 비망록에서 왕비와 자기가 동성연애를 했다는 것은 거짓이었다고 밝혔다.
추기경은 혁명의 와중에서도 살아남아 나머지 생애를 수도원에서 추방생활을 하며 지냈다. 잔느의 기둥서방으로 위조 전문가였던 빌레트는 이탈리아로 추방당한 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창녀 겸 배우인 니콜 돌리비아는 재판 후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었으나 28세로 세상을 떠난 후 신분이 밝혀졌다. 자칭 성자인 칼리오스트로 백작(Count Cagliostro)은 이탈리아의 종교재판 와중에서 감옥에 갇힌 후 세상을 떠났다. 잔느의 남편인 니콜라스는 혁명 후 파리로 돌아왔다. 잔느는 런던의 숙소 창문에서 떨어져 죽었다. 어떤 사람들은 잔느가 왕정주의자들의 손에 살해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빚에 쪼들린 나머지 집달리들을 피하려다가 3층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최근 마리 앙투아네트의 인간적 면모가 재조명되고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루이 16세가 쏜 활에 맞은 농민을 손수 치료해주기도 했고, 마차를 몰 때 소작농 밭을 망치지 않도록 밭을 비켜가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감자의 전파에도 큰 역할을 했다. 당시 감자는 악마의 열매로 취급당해 포로나 짐승에게나 먹이던 음식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감자의 효용에 주목했다. 궁정 안에서 감자를 경작하며 감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으려 했고, 대중이 감자를 친숙하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감자 꽃을 장식으로 달고 다니기도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비에 오르던 날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자신(농민)의 불행에도 우리를 매우 잘 대해주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가 그 어느 때보다 그들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남태우 교수:중앙대학교(교수)▸중앙대학교 대학원 문헌정보학과 박사▸2011.07~2013.07 한국도서관협회 회장 ▸2009.07 한국도서관협회 부회장▸2007.06~2009.06 대통령소속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 위원 ▸2004.01~2006.12 한국정보관리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