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아름다운 것이 많다. 연잎에 맺은 아침이슬도 은구슬처럼 아름답다. 막 피어나려는 꽃봉오리도, 한창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풋풋한 웃음소리도 보기 좋고 아름답다. 서산에 해지면 목로주점이 그립다. 친한 벗 불러내 컬컬한 목을 탁배기로 축이는 샐러리맨의 하루도 정겹다.
이런 정경을 일찍이 중국 명나라 말기에 철학자 홍자성(洪自誠)은 그의 저서 〈채근담(菜根譚)〉에서 ‘화간반개 음주미취 차중대유가취(花看半開 飮酒微醉 此中大有佳趣)’라 했다. 이는 “꽃은 반쯤 피었을 때가 가장 아름답고, 술은 은근히 취했을 때가 좋다. 이 가운데 참다운 즐거움이 있다.”고 갈파했다. 옛 사람들도 술 마시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음이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술처럼 그 양면성이 뚜렷한 것도 없을 듯싶다. 술은 잘 마시면 약주(藥酒)요 지나치면 독주(毒酒)가 되니, 한편으로는 백약지장(百藥之長)이요 또 다른 한편으로는 창자를 썩게 만드는 부장지약(腐腸之藥)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문인들과 철학자들 중 술에 대해 “하늘에서 내린 가장 아름다운 음식”이라는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음주문화에서 나타나는 현실은 어떤가.
흔하게 일어나는 코스는 벗끼리 혹은 접대성 술자리가 처음에는 삼겹살에 소주로 시작하다가 입가심으로 맥주 딱 한 잔만 하자는 선동이 일기 시작한다. 소주를 마시다가 도수 낮은 맥주를 마시면 맹물처럼 잘도 넘어간다. 이쯤 되면 취기가 돌기 시작하여 어느 정도 배짱도 생긴다. 이때부터는 술이 술을 부른다. 이어지는 코스는 단란주점이나 유흥주점이다. 우리의 일반적인 주행(酒行) 코스다. 술은 취하자고 마시는 것이란 전제를 놓고 보면 이 보다 더 좋은 코스는 없다. 3차정도 지나면 인사불성 단계에 접어들기 십상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어제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 모른다. 필름이 끊어지기 시작하면 술을 절제해야겠다고 마음먹지만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는가.
주변에서 “그 사람 술을 잘 먹는다”는 말을 듣는 것은 술의 양에 있지 않고, 자기 통제와 절제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주미취(酒微醉)’란 술을 마시긴 마셨는데 취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상태일 것이다. 주당들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말도 안 된다고 불평을 늘어놓을 것이다. 감질만 내고 말 바에야 아예 시작을 말아야 된다는 것일 테다. 이른바 끝장을 봐야 한다는 주당파들에게 주미취는 치욕이랄 수도 있지만, 옆집 아저씨가 기분 좋게 한 잔 하고 흥얼흥얼하며 유행가 자락이라도 읊조리며 퇴근하는 모습이 정겨운 것 아닌가.
우리는 취기가 주는 쾌감을 즐기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알코올을 필요로 한다. 그러면 취기로 인한 쾌감이 목에 쏟아 넣는 알코올의 양과 비례하는 것일까? 물론 그럴 리가 없다. 술을 많이 마시면 다음날의 숙취를 계산하지 않더라도 쾌감이라기보다는 고통에 가까운 것이다. 말하자면, 술이 주는 쾌감에도 한계효용이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술을 마시면 고통의 기미가 없는 쾌감의 극대치에 이르는 것이 미취(微醉)가 가리키는 바가 아닌가 한다. 실제로 술이란 마신 후 한참 지나야 마신 양에 해당하는 취기를 얻을 수 있으므로 미취를 느끼는 순간부터 취기는 일정하게 상승한다. 굳이 더 마시려고 하지 않아도 쾌감의 법칙에 맞게 술은 오르고 있는 것이다. 미취에 머물지 않고 취기를 탐하게 되면 머지않아 술의 지배를 받게 되고 사실상 즐거움은 거기서 끝난다.
이제 막 피어나려는 꽃봉오리나 적당히 취한 당신의 얼굴이 보기 좋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 한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