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 코스요리에 도전하다

일본에서 기자단들이 한국을 취재하러 왔다. 한국관광공사의 초청으로 방문한 기자단이었다. 8월 5일부터 3박4일 일정으로 오는데, 이틀째 저녁 식사를 강남에서 궁중음식으로 먹고 난 뒤에 막걸리를 맛보고 싶다고, 내게 막걸리 소개를 해달라고 했다. 궁중음식을 맛보면서 막걸리를 마시겠다는 것도 아니고, 궁중음식을 맛보고 나서 막걸리를 맛보겠다고? 이건 막걸리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배부른 상태에서 입가심으로 막걸리를 마시겠다니, 막걸리가 소화에 좋다고는 하지만 작은 잔에 한두 잔 마시고 마는 술이 아닌데 이건 막걸리를 너무 몰라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차라리 막걸리를 마시지 말라고 했다. 그랬더니, 일본기자단 진행팀에서는 선선이 궁중음식을 버리겠다고 했다. 일본기자들의 막걸리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지만, 궁중음식은 일본에 소개된 적이 있고 막걸리는 소개된 적이 없었던 희소성 때문에 채택한 안이기도 했다.
나는 막걸리가 코스요리가 될 수 있도록 식단을 짤 궁리를 했다. 요즘 서울이나 경주의 큰 관광지에서는 궁중음식도 한정식도 한상차림이 아니라, 너덧 단계로 나뉘어 나오는 코스음식화 되어 있다. 프랑스 요리도 코스요, 일본 요리도 코스요, 요리가 세계화 되려면 코스화가 되어야 한다는 게 요리사들의 얘기다. 그런데 코스요리화 된 한식을 맛보면서 드는 생각은, 맨 나중에 나오는 밥을 먹기 전까지 나오는 모든 것은 반찬일 뿐이라는 것이다. 좀 더 생각을 진전시키면, 반찬이 아니라 안주만 먹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술이 있으면 딱 좋을 안주들, 부각, 전유어, 잡채, 불고기, 낙지볶음 따위들이 차례로 나왔다가 사라져간다. 그래서 난 한식의 코스요리에 밥을 함께 주지 않으려거든, 속이 든든한 전분류인 떡이 좀 나오든지, 아니면 술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술이 있으면 그 모든 코스요리의 반찬들은 훌륭한 안주로 안정감과 존재 의미를 확보하게 된다. 술과 안주를 먹고도 속이 허하다면 마지막에 나오는 밥을 먹으면 된다.
내가 코스요리에 막걸리를 접목시켜 보려는 의도는, 한식 코스요리의 허전함을 달래보자는 것이기도 하고, 막걸리는 끼니가 되는 술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기자단 행사진행팀에게는 막걸리를 다 마시고 나면 식사도 동시에 완결되는 식탁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장소는 일본기자들이 머무는 곳에서 가까운 식당을 찾다가, ‘백세주마을’로 결정했다. 강남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막걸리를 잘 세팅할 수 있는 곳을 찾지 못한 게으름도 있지만, 국순당에서 운영하는 백세주마을에는 자체 제작한 탁주인 생막걸리, 캔막걸리, 미몽, 고시레, 이화주가 있기 때문이다. 술도가에서 운영하는 식당에서 술을 마신다는 것은, 목장에서 우유를 마시는 것처럼 신선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짠 식단표는 이렇다.

막걸리
칵테일막걸리
포천이동막걸리, 장수막걸리, 국순당생막걸리, 참살이탁주
세왕주조막걸리, 부산생탁, 강진병영설성동동주, 전주막걸리, 고양탁주
부자, 부산산성막걸리, 고시레
이화주

코스요리
타락죽, 오미자오이선
모둠 부침개
홍탁삼합, 두부김치
낙지볶음
불고기, 국수, 과일화채

코스요리는 백세주마을의 주방에 맡겼다. 내가 추가 요청한 것은 홍탁삼합이었다. 막걸리에 홍어요리가 빠질 수 없겠다 싶어 넣었고, 일본기자들이 홍어를 잘 먹을 수 있을까 궁금도 하여 넣었다. 외국을 여행할 때, 낯선 음식을 만날수록 그 나라에 대한 인상도 강렬해지기 때문이다.
이 식단표는 막걸리를 중심에 두고 짠 것이었고, 막걸리를 많이 소개하기 위해서 짠 것이었다. 이 술을 다 마실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한국 막걸리의 특징을 보여주는 자리라 행사 전날 택배 주문하여 이것저것 모았다.
막걸리를 배열한 기준은 이렇다. 첫 번째 일본에서 칵테일막걸리가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기에, 우선 낮은 도수의 달콤하거나 새콤한 막걸리로 첫잔을 준비하려 했다. 그런데 실제 진행할 때는 칵테일막걸리가 준비되지 않아, 생막걸리와 살균막걸리로 대체했다. 일본인들은 주로 한국산 살균막걸리를 마시기 때문에, 막걸리의 풍성한 맛을 잘 모른다. 그래서 막걸리의 특징도 소개할 겸 생막걸리를 먼저 준비시켰다. 두 번째는 수도권에서 맛볼 수 있는 대표적인 막걸리를 배치시켰다. 세 번째는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경기도권의 막걸리를 고루 배치하여 지역 특징을 가늠해볼 수 있게 했다. 네 번째는 특징 있는 막걸리, 알코올 10%의 부자, 배용준이 운영하는 일본 고시레 음식점과 제휴하여 일본시판용으로 만든 고시레 막걸리, 알코올 도수 8%로 전통누룩으로 만든 산성막걸리를 준비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려시대부터 전해오는 탁주로 국순당에서 재현한 이화주를 준비했다. 이화주는 도수 높은, 막걸러낸 술이 아닌 그냥 흐린 탁주다. 고급탁주의 한 전형으로서 멋진 술이다.
이렇게 막걸리코스 요리를 짜고서 일본기자단을 맞이했다. 모두 11명의 기자단인데, 남자가 4명이고 여기자가 7명이었다. 먼저 이날 먹을 막걸리를 전부 전시해놓고 사진촬영을 진행했다. 이어 생막걸리를 소개하고, 한잔씩 술을 음미해보았다. 한 일본 여기자는 일본에서 맛본 막걸리와는 달리, 혀를 토독 건드리는 감촉을 신기해했다. 생막걸리는 10도에서 10일간 보관이 가능하도록 유통기한이 제한되어 있다. 살균막걸리는 6개월에서 1년 정도 유통할 수 있다. 일본으로 수출되는 막걸리는 그래서 탄산가스가 들어있지 않은 완전 숙성된 살균주가 대부분이다. 요즘에는 냉장보관하여 생막걸리가 수출되고 있지만 그 비율이 미미한 실정이다.
검은콩 막걸리는 없냐고 옆에 앉은 시미즈시카코 기자가 물었다. 검은콩의 달작한 맛이 인상적이었던가 보다. 한국에서 기능성 막걸리라 하여 조껍데기, 더덕, 인삼, 검은콩, 누룽지 따위가 들어간 막걸리가 나오긴 하는데, 나는 이날 자리에 준비하지 않았다. 첨가물이 들어가서 맛을 달리한 것보다는 곡물과 누룩으로 만든 정통 막걸리로 한국 막걸리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홍어를 잘 먹는 일본인은 드물었다. 한 사람 정도가 입맛에 맞다고 했다. 나는 그 정도면 한국에 살아도 되겠다고 말해주었다. 일본기자들은 코스요리에 맞춰서 막걸리가 나올 때마다 사진을 찍어대며 신기해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잔을 요구했다. 이날 자리에서 미처 준비되지 못한 것이 술잔이었다. 일본기자들은 술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술잔을 찾는데, 그 술잔이 술처럼 달라져도 좋다고들 여기고 있었다. 한국은 모두가 똑같은 술잔으로 마시는 것을 편하게 생각하는데, 일본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마치 녹차를 마실 때처럼 잔이 제각각이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저녁 만찬은 6시 반에 시작하여 10시에 끝났다. 10여 가지 막걸리를 맛보고 마지막에는 국수로 마무리하였고, 모두들 흔쾌히 취하고 한껏 만족해했다. 모두들 조심스럽게 막걸리를 맛보고, 막걸리 하나하나마다 그 특징들을 가려내려 애쓰는 모습들이었다. 이날 자리는 여느 와인파티에 뒤지지 않은 멋진 자리였다. 우리가 와인을 수입술로 여겨 신기하게 맛보는 것처럼, 일본인들은 막걸리를 신기한 술로 여겨 조심스럽게 정성껏 마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결론을 얻었다.
“우리에게 와인이 먹히는 것처럼, 외국인에게 막걸리가 통할 수 있구나.”

글·사진 허시명(여행작가·술 평론가)

<사진설명>
막걸리를 마시며 즐거워하는 일본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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