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자적 음주와 대자적 음주의 술 알레고리

남태우 교수의 취중진담

즉자적 음주와 대자적 음주의 술 알레고리

 

<논어> 제1장에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유봉자원방래불역낙호(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즉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 한가’로 시작된다.

이러한 안으로부터의 기쁨과 밖으로부터의 기쁨을 승화시키는 방법에는 음주가 빠질 수는 없다. 전자의 기쁨의 상태에서 마시는 술은 ‘열주(悅酒)’요, 후자의 벗과 만남의 기쁨에서 마시는 술은 ‘낙주(樂酒)’가 된다.

여기에서 ‘기쁨’의 ‘열(悅)’과 ‘즐거움’의 ‘락(樂)’은 세 가지로 발음된다.

‘풍류악(音樂, 風樂)’, ‘즐거울 락(樂乎, 悅樂)’, 그리고 좋아 하다의 ‘요(樂山樂水)’의 의미이다. 기쁨을 나타내는 ‘낙(樂)’과 ‘열(悅)’에서 ‘열’은 내면에서 생성된 기쁨이고, ‘낙’은 인간과 인간관계에서 사회적으로 성립하는 즐거움으로, ‘열(悅)’은 ‘즉자적(卽自的)’이고, ‘락(樂)’은 ‘대자적(對自的)’이라고 할 수 있다.

‘즉자(an sich)’란 ‘곧(卽)+스스로(自)’의 합성어로 그냥 단지 존재 하는 것이다. 따라서 ‘즉자적 존재’는 세상이 어떻게 생성·변화 하는지를 스스로 깨닫는 존재로 자신에 대한 의식이 강한 존재이다. 그러나 ‘대자(fursich)’란 ‘마주하다(對)’의 의미로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을 의미한다.

‘즉자’는 의식이 있는 주체적 존재이고, ‘대자’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것이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존재다. 그렇지만 자기 자신에 매몰되어 전혀 객관적이지 못한 것을 ‘즉자적’이라 하고, 이것은 동물적 태도이다. ‘대자적’ 태도는 이와 반대로 주관인 자기 자신까지도 객관화 하여 반성하고 관찰하는 태도이고,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이 가진 다른 동물과의 차이이다.

‘열’과 ‘낙’의 ‘열락(悅樂)’의 상태를 형이상학적으로 승화시키는 방법에는 다양하지만 음주와 관련된 측면에서 ‘풍류적 음주문화’를 꿈꿔 보면서 다음을 제안한다.

먼저 ‘Wine’을 ‘행복(Well-being)’, ‘영감(Inspiration)’, ‘고결(Nobleness)’, ‘감동(Emotion)’의 머리글자를 조합하면 ‘WINE’이 된다.

또한 청나라 때 발간된 <소림광기(笑林廣記)·황문(簧門)>편에 소화(笑話) 한 토막을 소개하여 풍류적 음주문화를 그려보고자 한다.

선비들이 기생집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선비 하나가 묻길, “형씨는 전공이 뭐시오?”

답하길, “시경(詩經)에 통했소.”

또 묻길, “그 다음은?” “서경(書經)에도 통했소.”

이에 옆에 앉은 기생에게 농담으로 묻길, “넌 뭐에 통했느냐?”

기생 답하길, “전 월경(月經)에 통했죠!”

좌중에 폭소가 터졌다. 기생이 즉시 목청을 높였다.

“선비님들, 웃지마소, 당신들이 무엇에 통했든, 모두 ‘월경’을 통해서 나온 거예요!”

성현의 가르침을 우리는 베 짜는 날실에 비유하여 ‘경(經-베틀에 감긴 세로줄)’이라 한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유교의 기본 경전으로 삼았는데 여기에서는 ‘경(經)’을 ‘上一經’과 ‘下三經(詩經, 書經, 易經)’으로 부르고자 한다.

인간의 태어남이 먼저이고 그 후 배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배란형 월경의 기능이 없다면 태어남이 없는데 ‘삼경’의 존재 의미는 없다. 음주의 목적은 취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그를 의탁하여 인간적 삶을 윤택케 하는데 있다.

◇ 필자 남태우 교수:▴전남대학교 문헌정보학과 교수▴중앙대학교 문헌정보학과 교수▴중앙대학교 중앙도서관장▴중앙대학교 교무처장▴중앙대학교 문과대학장▴한국정보관리학회장▴한국오픈엑세스포럼회장▴한국 문헌정보학교수협의회장▴대통령소속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 위원▴한국도서관협회장▴중앙대학교 명예교수(현재)▴현재 건전한 음주문화 선도자로 활동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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